
무너지지 않고 지켜내기‘건축학 개론’을 다시 보고음악과 함께 올라가는 하얀 엔딩 크레딧을 한참 동안 멍하니 지켜봤다. 아직도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건축학 개론 숙제를 하기 위해 정릉에 사는 대학 1학년 동급생 승민과 서연은 한 건물 옥상에 올라 서울 시내 사진을 찍는다. 서연은 가방에서 시디플레이어를 꺼내고 이어폰 하나는 자기 귀에, 나머지 하나는 ‘음악 들을래?‘하며 승민의 귀에 꽂아준 뒤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아주 잠깐의 고요, 그리고 조용히 울러 퍼지는 노래. 저음의 김동률, 기억의 습작이다. 영화는 예기치 않게 현재로 침투해 버린 첫사랑의 기억을 아련하게 그려내는 한편, 첫사랑으로 인해 가슴 깊이 남은 상처가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았음을, 듬성듬성 꿰맨 채 살아온 ..
영감의 때| 영감은 창작의 실마리가 아니라 매듭이다. 고민하고 애쓰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창작자의 작업실로 찾아와 한 세계를 완성하게 하는 것이 영감이다. 신은 흙으로 만들어진 형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 역은 아니다. 창작자의 고민과 수고의 산물인 흙의 형상이 있어야 신은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영감에 의지해서 자동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의 지난한 수고의 과정 속으로 영감이, 은총처럼 임한다. |- 이승우 저, ‘고요한 읽기’ 46-47 페이지에서 발췌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필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을 만났다. 작가노트에 조용히 옮겨 적는다. 종종 반짝이지 않아도 내면 깊숙한 곳으로 훅 들어오는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어떤 은총을 체험한다. 어떤 작가의 고민과 수고의 산..

이야기보다 이야기꾼이 더 드러나는 작품무라카미 하루키 저, ‘일인칭 단수’를 읽고1. 돌베개에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거기엔 어떤 공통된 정서가 흐르는 것 같다. 이 짧은 단편을 읽고도 동일한 걸 느꼈다. 몇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 이를테면, 죽음, 문학, 환상, 섹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고 어설픈 남자 주인공 등이다. 언뜻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키워드들은 하루키의 사상 혹은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관념과 통속의 조화를 도스토옙스키 덕분에 진하게 맛보았던 나는 하루키 역시 그만의 독특한 방식과 고유한 문체로 소설을 쓰는, 현대문학의 거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도스토옙스키와 비교하면 깊이랄까, 통찰이랄까 하는 측면에서 내게 하루키는 가볍게 느껴지..

지경을 넓히는 작품을 만나다최진영 저, ‘구의 증명’을 읽고기발한 발상, 기구한 사건, 독특한 전개. 고전문학과 구별된 현대문학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는 나는 개인적으로 진부하리만큼 뻔하디 뻔한 이야기 속에서 빛바랜 진리에 다른 빛을 비춰 재발굴해 내는 고전문학을 선호한다. 그런 이유로 한국 현대문학은 즐겨 읽지 않는 편이다. 상상력을 키우고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을 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구도 혹은 설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 내지는 서론만 거창하다가 본론은 흐지부지해지는 상황을 자주 유도해서 소탐대실을 초래하는 걸 자주 봐왔고, 또 그런 작품들에 대한 실망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만나는 작가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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