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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정체성의 재확인

가난한선비/과학자 2020. 3. 5. 16:30

정체성의 재확인.

모든 사람은 하나 이상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 역시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 그리고 직장 안에서는 아직도 주류에 들지 못한, 아니 영원히 들지 못할, 아니 들 마음이 이젠 없는 생물학자로, 직장 밖 오프라인 사회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497 한국 중년 남성으로, 그리고 여기 온라인 페북 세상에서는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꽤 괜찮은 이미지를 풍기며 잘도 살아가고 있다.

각 정체성은 나름대로의 만족감을 요구한다. 인간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거기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 존재이기에,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든지 그 시공간으로부터 인간은 만족을 바라게 된다. 남편으로서 느끼는 만족이 있는가 하면, 아빠로서 느끼는 보람도 있다. 한편, 좋은 사람과 좋은 책을 만남으로써 일상 속 행복을 만끽하기도 한다.

생물학자로서, 아니 일개 학자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만족은 아마도 논문 출판에 있을 것이다. 지난한 연구 과정이 가시적인 열매를 맺는 순간이기에 그동안 수면 아래서 고군분투하던 시간이 한꺼번에 보상을 받는 듯한 기분을 선사해주기도 하는 동시에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 정체성의 만족은 그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정체성의 재확인이 정체성의 만족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각 정체성의 재확인을 암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올해엔 정말 간만에 논문을 출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첫 저자로서 마지막 논문을 출판했던 게 2015년이니 올해 논문이 출판되면 자그마치 벌써 5년 만인 것이다.

박사 나부랭이가 된 지 10년이 넘었다. 나이 사십이 넘었는데 할 줄 아는 게 생물학 밖에 없어서 이 짓을 계속 하며 밥벌어먹고 살고 있다. 대학원생으로 입학할 때부터 고민하고 갈등했던 문제가 아직도 내겐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 생물학자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 나는 과연 생물학자인가. 나에게 주어진 직업이 맞는가. 나는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인가. 나는 이 일이 좋은가. 이 일을 사랑하는가. 즐거운가. 등등의 질문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메아리쳐 울린다.

올해 논문이 출판되면 나의 과학자로서의 위상이나 마인드, 혹은 미래의 방향이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지만, 적어도 생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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