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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진지공사

가난한선비/과학자 2020. 3. 12. 01:41

진지공사.

이사 후 이틀 째. 아직도 구름 위를 걷는 듯 몽롱한 상태다. 그렇다고 잔뜩 긴장한 것도 아닌데, 그저 힘이 없고 오랫동안 집중을 못하겠다. 금새 졸음이 몰려오곤 한다. 다행히 무릎과 손가락은 조금씩 괜찮아지는 듯하다. 결론은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데 쉴 수가 없다.

아이의 학교를 일부러 바꾸지 않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전학을 시키면, 내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지 않는 한 6시까지 아이를 애프터스쿨에서 픽업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엔 한 시간 운전해서 아이를 학교에 들여보냈다. 나중에 퇴근할 때도 한 시간은 운전해야 할 것이다.

군대에 있을 때가 갑자기 떠오른다. 육체적으로 무지막지하게 힘든데 쉴 수 없는 상황. GOP가 아닌 FEBA에서 일병으로 근무할 때였다. 1999년 연천, 무더운 여름날, 진지공사라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몇 주간 지속되었던 작업은 한 마디로 노가다였다. 새벽부터 어떤 이름도 모르는 산에 올라 타이어와 돌무더기, 벽돌 등을 마대자루에다가 하루 종일 날랐다.

허탈한 건 그 지난한 작업이 끝나고나서도 진지는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전쟁이라도 나게 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참나... 저게 무슨 진지라고... 허탈했다. 정말 허탈했다. 덕분에 난 성장이 멈춘 후 최저 몸무게 77키로를 찍을 수 있었지만, 내 머릿 속에선 시지프스의 신화가 자꾸만 겹쳐져서 매일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냥 입 닥치고 아무 생각 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 그래서 그냥 난 육에 충만했었다. 마치 머리가 없는 것처럼.

몸은 엄청 피곤한데 정신이 몽롱하니 내 상태가 딱 진지공사할 때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래도 이번은 다르다. 머리를 없애기로 작정할 만큼 긴 기간도 아니었을 뿐더러 진지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집. 여전히 렌트하는 상황을 모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들 녀석도 저번 집보다 열 배나 좋다고 하고 나도 집이 밝고 탁 트여서 참 맘에 든다. 보람이 있다. 이제 아내만 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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