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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함과 알싸함의 공존.

이반 투르게네프 저, '첫사랑'을 읽고.

손님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난 어느 늦은 밤, 방 안에는 세 명만이 남았다. 적적함을 달래보고 싶었는지 느닷없이 집주인이 돌아가며 첫사랑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자기 순서가 다가오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먼저 자신은 말솜씨가 전혀 없다고 운을 뗀 뒤, 첫사랑 이야기를 말로 하는 대신 기억나는 모든 것을 글로 써서 다음 번 만날 때 읽어주겠노라고 말한다. 썩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니었지만, 그는 두 주 뒤 보란 듯 그 약속을 지킨다. 이 책은 블라디미르가 쓴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회고록인 셈이다. 또한 실화에 입각한 저자 투르게네프의 자전적인 수기이기도 하다.

열여섯 살. 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선 나이. 블라디미르는 첫사랑을 경험했다. 그 낯설지만 압도적인 이미지. 순간이 영원이 되는 것만 같았고, 기꺼이 한 여자의 노예가 되리라 다짐까지 하며,  멈춰진 시간 속에서 폭풍처럼 뛰는 심장을 움켜잡던, 그러나 어느새 덧없는 바람처럼 흘러가버린 나날들. 그에게 첫사랑은 열정의 시작이었고, 동시에 고통의 시작이었다. 풋풋한 감성으로 덧입혀진 것만 같은 기억 속에는 너무나도 아프고 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억들까지도 공존하고 있었다. 

세밀한 감정까지 기억해내며 노트에 옮기기까지의 두 주 동안 과연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처음에는 아마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떤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으로 폭풍 같은 기억 속으로 돌아가 다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가슴 아파 울기도 하며 분노하기도 하고 자책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흘러가버린 세월 앞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추억의 잔상이 전해주는 애잔함에 흠뻑 젖고는 다시 겨우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아, 그 기억을 일일이 들춰내어 글로 옮기기까지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나이다. 블라디미르의 첫사랑.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갓 성인이 된 나이. 그와는 다섯 살 차이. 블라디미르의 마음을 단번에 앗아간 그녀는 그녀를 추종하는 여러 명의 성인 남자들의 마음을 주무르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숭배하게 할 만큼 영악하고 조숙한 여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년이었던 블라디미르에게 지나이다는 성인들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문이기도 했다. 그에게 첫사랑의 이미지는 이성을 향한 호기심이나 동경과도 같은 낭만으로만 채색되지 않았다. 그의 첫사랑은 소년에서 어른으로의 변화를 겪는 시기와도 겹쳐졌다. 이러한 면에서 블라디미르는 아마도 통 종잡을 수 없는, 마치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혼란스러움과 불안과 초조를 동반한 감정으로 그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첫사랑 기억이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충격적인 실체와 대면해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지나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지나이다를 한창 숭배하던 그 불꽃 같던 시절, 블라디미르는 불현듯 그녀의 마음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닐까 내심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내 자신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자존심이 무척 상하기도 했으나,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은 아직 소년이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블라디미르는 다행히 적어도 돈키호테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여신과도 같았던 지나이다의 마음을 훔쳐간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가히 충격이었다. 어느 깜깜한 밤, 그녀의 창이 보이는 정원에 몰래 숨어있던 블라디미르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출현을 목격하게 되고, 당황하여 잠시 넋을 놓았다가 그녀의 방을 쳐다봤을 때 침실 안 불빛이 잠시 비쳤다가 커튼이 조심스럽게 창틀까지 내려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사랑이란 거구나, 했다. 마침 누군가의 폭로로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은밀한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자, 블라디미르는 왠지 모를 분노와 기사도 정신과 흥분이 마구잡이로 혼합되어 온전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충분히 버거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사를 감행하고 난 이후 다행히 블라디미르는 곁길로 새지 않고 원래대로 공부하여 대학까지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만난 지인 덕분에 몇 년 만에 지나이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결국 그는 그 기회를 일부러 놓쳐버리고 만다. 두려웠던 것이다. 용기가 안 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며칠 뒤 들은 소식은 그녀가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후회했다. 쉽게 잊혀질 후회가 아닌 영원한 후회가 되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첫사랑의 풋풋함과 아픔의 공존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정도와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있을 어수룩하고 부끄럽기만한 첫사랑의 기억. 할 수만 있다면 얼른 수정하고 싶은 마음이 돌연 들다가도,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게 아름다움이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건, 나도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탓일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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