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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것들, 그리고 고독.

보후밀 흐라발 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시끄러운 고독’. 사실, 제목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책이다. 중고서점에 들를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마주쳤던 책. 그러나 나는 이상하리만큼 한 번도 그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책을 볼 때마다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은 ‘아마도 이 책 또한 과대포장된 제목의 책’일 것이라는, 별 근거 없는 나의 상처 입은 신념이었던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펼쳐보다가 적잖은 실망을 했던 적이 어디 한 두번이던가. 이 책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게다가 저자 이름도 생소하고 해서, 난 그냥 제목만을 읽고 표지만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최근, 평소에 내가 참 좋아하는 필체로 글을 쓰시는 지인이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쓴 것을 보았다. 익숙한 제목과 익숙한 표지, 그러나 낯선 내용. 순간, 내가 중고서점에서 그 책을 볼 때마다 했던 생각이 철저히 틀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말에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중고서점에 들려 그 책을 구입했다. 다행히 그 책은 비슷한 자리에 꽂혀 있었다. 마치 계속해서 내 손길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 책은 장편소설로 분류되지만, 상당히 짧은 분량의 작품이다. 그다지 큰 집중을 하지 않아도, 두 어시간에 다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의 제목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과대포장된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 한타는 삼십 오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습하고 퀴퀴하며 어두운 지하실에 위치한 그의 작업장에는 압축기 한 대와 수많은 종이 (책)와 쥐들이 산다. 저만치 위에서는 언제나 화가 난 듯한 소장의 불평과 잔소리가 큰소리로 들려온다. 늘 구부리고 일을 하느라 허리가 구부러지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마치 시끄러운 세상과는 단절된 듯 고독 속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한타.

이야기만이 아닌 글에서 시적 이미지를 떠올려보길 좋아하는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한타와 그의 작업장을 머리 속에 그려봤다. 꽤 흉측하고 기괴한 그림이 그려졌다. 내 그림 속에서 한타는 마치 꼽추와 흡사했다. 저자가 묘사한 것처럼 잘 씻지도 않는 그의 몸에선 곰팡이 냄새와 쥐 냄새가 나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몰골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가 즐겨 마시던 맥주를 파는 곳에서 계산할 때 옷 속에서 쥐가 뛰쳐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읽으니 더욱 내 그림 속의 한타는 처참하고 처절한 인간의 대표가 되어버린 듯했다. 잊혀진 듯한 인물, 그리고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인물.

그러나 한타의 일상은 압축기가 내는 괴물 같은 소리나 쥐들이 은밀하게 내는 조그만 소리, 혹은 소장의 고함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시끄러운 세상만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그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폐지를 압축하는 성실한 사람만도 아니었다. 그는 폐지가 되기 직전의 수많은 책에서 추출한 어마어마한 양의 문자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마치 폐지를 압축하듯 고독하게 머리와 몸에 압축하여 흡수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시대가 원하지 않거나 남아돌거나 잘못 만들어진 책들을 파기하는 작업의 맨 마지막 단계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그가 섭렵하는 지식의 출처도 모두 시대가 어쨌거나 파기하길 원하는 책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좋아한 건 고전적인 책들이었고 , 또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대가 원하는 책들은 그의 냄새 나는 지하실 작업장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테니.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고성능의 압축기가 개발되었다. 한타에게는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폐지를 압축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 압축되어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 가운데 나름대로의 자존감을 찾기도 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계는 그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했던 양의 책들을 단 몇 시간만에 해치웠고, 그가 휴가까지 반납하고 몇 푼 안되는 수당을 받으면서 일을 해야만 마칠 수 있었던 일은 멋드러진 유니폼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희희낙낙거리면서 일을 마치고 어디 놀러갈까 이번 휴가에는 어디 갈까를 지껄이면서 진행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로 변해버렸다.

한타는 말문이 막혔다. 더욱 시끄러워진 기계와 전문성이나 경험 없이도 충분히 자신이 했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단시간에 처리하는 젊은이들의 시끄러운 지껄임 가운데 한타는 더욱 고독했다. 그는 늙었고, 그가 은퇴 후 사려고 마음 먹었던 그 압축기 또한 이젠 시대에 걸맞지 않은 저사양의 그것이 되어버렸다.

그곳에 한타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습하고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 작업장과 그 안을 언제나 가득 채우고 있던,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책들, 그리고 그와 동반자였던 쥐들이 있는 그 작은 세상이 그에겐 그나마 위로요 안식처였는데, 이젠 그마저도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한 것이었다.

세상은 더욱 시끄러워졌고, 한타는 한층 더 고독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작업장을 찾는다. 늘 하던 압축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압축기에 넣은 것은 폐지가 아니었다. 자기자신의 몸이었다. 그렇게 그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고독 속으로 생을 마감한다.

다소 끔찍한 책의 마지막 설정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강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그의 고독에 가슴이 미어졌고, 이해가 충분히 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왠지 모를 동질감까지 느껴졌다. 내 안에도 한타의 모습이 있는지 모르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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