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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과 가능 사이의 겸손함으로.

신형철 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상처와 치유의 무한반복은 빙빙 도는 원과 같아서,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와 치유의 상대적 기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둘 사이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사람으로 변모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상처의 심연에 정체된 채로 원이 아닌 단 한 점으로 이루어진 인생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삶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낮은 마음으로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거기엔 상처 받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 어쩌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나로부터 남에게로 향하는 삶. 이 겸손한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공부.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인생은 타인의 상처, 고통, 아픔, 슬픔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공감해 나가는 긴 여정, 다시 말해 슬픔을 공부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나는 묻는다. 나는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목적으로 교활한 눈빛을 숨긴 채 핑크빛 물감이 잔뜩 묻은 커다란 붓을 들고 내가 아닌 타인의 삶과 내가 모르는 세상의 여백을 함부로 칠해왔던 건 아닌지. 공적인 자리에서는 피라미드 무한경쟁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은밀한 곳에서는 누구보다도 승자독식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칙을 고수하며 승자, 강자, 적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숨 가쁘게 타인을 무시하고 짓밟아 내 행복을 이루는 땔감으로 사용하려고 애썼던 건 아닌지. 내 얼굴이 아닌 상대적 약자들의 얼굴에 땀을 흘리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지혜이자 성공이라는 신념에 떠밀려 나도 몰래 무고한 그들의 등에 빨대를 꽂아 단물만을 빨아먹으려고 했던 건 아닌지. 나의 시간과 나의 열정의 방향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조용한 밤, 스탠드 불빛만이 책상을 비추고 있는 조그만 방에 앉아 나는 나 자신에게 조심스레 물어본다.

그랬더니 금세 슬퍼진다. 니버가 말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괴리 때문에도 그렇고, 돌이켜보면 해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눈치 보며 망설이다가 결국 행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내 모습이 가소로워져서도 그렇고, 나는 이런 제한을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처량하게 느껴져서도 그렇다.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며 해가 갈수록 살아가는 동안 공부가 점점 더 필요한 것이며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의 가치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지만, 나의 인식과 공감의 한계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나는 슬프다.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전진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기분. 불가능과 가능 사이에 선 자는 존재와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고, 그 답의 파편을 조금씩 알아갈 때마다 조금씩 더 슬퍼진다. 나의 조심스러움이 훗날 미련함과 우유부단함으로 남을까 봐, 나의 용기 있는 결단이 상대방에겐 뜻밖의 상처를 남기게 될까 봐 나는 늘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공부를 지속해야 함을 안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슬프다는 신형철의 말은 옳다.

상처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견뎌내는 모습이 각양각색이며, 상처나 슬픔의 정도 또한 아라비아 숫자로 단순하게 디지털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정작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우리들이 그 말에 담긴 진심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지는 언제나 미지수로 남는다.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슬픈 또 다른 이유는 마땅한 교과서의 부재, 아니 존재할 수 없는 교과서의 존재 때문이다. 적당하게 깊은 상처가 아닌 골수를 찌를 정도의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논리와 이성의 단계를 넘어섰고, 감정과 감각의 단계도 넘어서서 혼자만의 섬에 갇힌 채 사람들과의 소통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이라든지 공황장애라든지 하는 불청객과 동거하는 사람들이 상처 입은 사람들 중에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자 우리가 그들에게 마이크를 떠넘기는 행위조차 그들에겐 일종의 폭력으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상처 입은 자들의 말에 신뢰를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자칫 객체로 전락하고 마는데, 이러한 경솔한 현실에서는 아무리 상처와 치유에 대한 무성한 말들이 존재해도 정작 상처가 무엇인지 치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모순된 상황에서 그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어쩌면 우리에게도 아직 양심이 남아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양심이 더 많이 발현되어 상처 입은 자들이 상처 받았다고, 그래서 아프다고 죽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꿈꾼다. 함부로 설교를 퍼붓거나 정답을 던져대는 경솔함은 사라지고, 경청하는 마음과 시간을 기꺼이 내는 겸손함이 살아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 바람에서조차도 나는 경솔함의 냄새를 맡는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작은 내러티브들을 마주할 것을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내 안엔 어떤 일괄적인 원칙이나 공식을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서다.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건 결코 일반화시켜 공식화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하게 필요한 건 진정성 어린 교감일지도 모른다는 것. 개별적인 타인의 슬픔 앞에 설 때마다 영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내 마음과 생각은 잠잠해지기가 어렵다. 불안과 초조, 긴장과 두려움이 동반되는 건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슬픈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 건, 어쩌면 우리가 타자의 슬픔을 습관처럼 그동안 너무 함부로 대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고 아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신형철이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한 권으로 짜 맞춘 책이다. 제목도 글을 다 모아놓고, 내용이 비슷한 것끼리 분류하고, 출간되기 거의 직전에 아내와의 대화 가운데 우연히 얻어냈다고 한다. 이런 표현이 이 책의 무게를 경감시키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신형철이 직접 고백한 말이기에 사실은 사실인 셈이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평균 서너 페이지 정도의 짧은 기고문들의 모음집인데, 각 부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1부부터 슬픔, 소설, 사회, 시, 문화, 이렇게 다양하게 다뤄진다. 알다시피 신형철은 소설가도 사회부 기자도 시인도 문화평론가도 아니다. 그는 문학평론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문학평론가가 쓴 글로 읽어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사실은 특히 1부 슬픔 편을 읽을 때는 더 유념하는 편이 좋은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슬픔이라는 것이 소설, 사회, 시, 문화처럼 어떤 한 장르나 분야를 일컫는 분류가 아니라는 점,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심리학자나 상담가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가르치려 한다는 느낌은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함께 공부해 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갈 필요가 없다는 이점을 가진다. 제목에 이끌리어 맘에 드는 글을 골라 그 글만 읽어도 되고, 다섯 중심 주제 중 하나를 택하여 그 부를 먼저 읽어도 된다. 만약 시간이 없다거나 이 책의 코어를 맛보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나는 1부를 추천한다.

2018년 말, 가족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 중고서점에 들러 한 시간 정도 책을 구경하던 일상을 누리던 시절, 나는 이 책을 출간 즉시 훑어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형철이 누군지 몰랐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이니, 나의 인문학적 소양은 터무니없이 부족했을 때였다. 지금이라고 얼마나 늘었겠냐마는 그 이후 2년 간 내가 꾸준히 읽어온 책이 100권을 훌쩍 넘긴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언가는 달라져도 달려져 있을 것이라 혼자서 생각해본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짚어 들고 찬찬히 훑어보았을 때 내가 느낀 첫인상은 ‘어렵다’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로선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땐 이 책이 이상하게 잘 읽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2년 전의 나와 지금 현재의 나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발견해야 할 터인데, 신형철 글의 난이도나 다루는 주제 등이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을 다루고 있는 건 아니라서, 어떤 구조적인 문제는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이루는 텍스트가 아닌 그 텍스트 이면에 흐르는 콘텍스트를 내가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아마도 최선의 설명이 아닐까 한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 책을 읽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너무 단순화시켜 비교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공부’가 있었다. 그 공부는 내가 전공했고 현재 밥벌이로 삼고 있는 생물학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철학과 인문학, 그리고 신학 분야에서 읽고 쓰고 묵상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온 게 보이지 않는 차이를 조금씩 만들었고, 마침내 이 책이 출간된 지 2년 후 읽게 되었을 때 스스로 그 차이를 체감할 정도로 가시적인 효과를 내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동안 나 하나로 가득 찼던 내 인생에는 위로 향하는 공부만 있었을 뿐 옆을 바라보거나 뒤를 생각하는 공부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더 큰 나를 만드는 공부는 진정한 공부일 수 없다고. 적어도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의 공부와는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진정한 공부는 나를 넘어 남을 향하는 애씀이라고.

이 책을 읽고 나니 마치 신형철과 직접 만나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깊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심정이다. 2년 간 그가 추천해준 여러 책을 읽어왔고 감상문도 남겨왔다. 그의 사상과 생각의 흐름과 방향이 나의 그것들과 많이 닮아있음을 느낀다. 글쓰기라는 행위에서도 배울 게 많았다. 글쓰기를 건축과 같은 행위라고 정의하는 그는 문장은 쓰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문장은 하나밖에 없으며 그 문장을 찾아서 사용하는 것. 정확한 글쓰기를 지향하는 그의 조언이 내겐 많은 지침이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쓰기 스타일과는 상극이라 할 수 있고, 소설을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작가의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조언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꼭 새겨들어야 할 말일 것이다.

겸손한 자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고백한다고 한다. 반면, 교만한 자는 공부와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과 기술을 타인을 억압하고 군림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 대비는 타인의 슬픔을 공부할 때도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나 같은 경우, 슬픔은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고, 그래서 슬픔을 더 모르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행이다. 겸손이 타인의 슬픔을 공부할 수 있는 문이라면, 적어도 나의 방향이 그리 틀리진 않은 셈이니 말이다.

#한겨레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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