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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깊이를 가진 신앙.

 

이정일 저,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를 읽고.

 

마흔 언저리,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면서 신앙에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확신에 차 있던 많은 것들이 손가락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의심의 구렁텅이로 떨어졌습니다. 그곳은 어두웠고 저는 외로웠습니다. 자발적 고독이 아닌 강압적 고독을 홀로 견뎌내야 한다는 건 인간의 강함을 훌쩍 넘어서는 영역의 일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보편적인 광야의 이점을 일반화시켜 현재 광야에 처한 모든 개별적인 사람에게 함부로 설파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광야에 처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광야를 다 통과하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내려놓는 게 아니라 내려놓아짐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어떤 새로운 힘을 형성하는 포기가 아닌 죽음을 상징하는 포기 말입니다. 기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입은 마르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습니다. 저의 경우는 수년이 지나고 이때의 경험이 소중한 자산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고통은 언제나 현재형이기에 그 당시 눈이 먼 상태의 저에게는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의 검도 아무 소용이 없는 듯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 잃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에겐 저 멀리서 가느다랗게 비쳐 오는 빛줄기의 아주 작은 구멍 역할을 해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잃어버릴 땐 아파하고 억울해하다가 어떤 선을 넘어서게 되면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하죠. 눈물은 마르고 얼굴은 굳어집니다. 형용할 수는 없지만 어떤 다른 세상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처럼, 마치 초탈한 것 같고 마치 안정한 상태에 이른 것처럼 됩니다. 위험한 시기죠. 다행히도 저는 이 시기가 야기하는 두 가지 큰 갈래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온 희망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은혜였죠. 이를 다른 한 단어로 표현하면, Reset, ‘다시 시작하기’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들은 저의 내면세계의 컨트롤 타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채 저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근사한 기독교라는 옷을 입고 말이지요. 예수를 믿는 신앙은 저에겐 액세서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선하게 보이고 싶어 하지만, 정작 삶에서 선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드물죠.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저에겐 그저 제가 이루고 또 바라고 있던 인생의 목표, 즉 성공과 출세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덮어주는 가장 효율적인 완충제이자 그럴듯한 포장지 역할 정도였던 것 같거든요. 성공해 놓고 상 받는 자리에 서서 그저 한 마디 멋지게 던지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렇게요.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네, 저는 은혜의 과정 없이 은혜의 결과만을 취하고,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닌 은혜를 입은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위선자였죠.

 

돌이켜보면 천만다행입니다. 이게 진짜 은혜죠.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저도 그 낮은 점에서 굴복하지 않고 간신히 견뎌낸 뒤 결국 저의 실체를 대면할 수 있었으니까요. 견뎌내는 것. 어쩌면 신앙은 견뎌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답니다.

 

치부를 깊게 들여다본 사람은 반동적인 힘에 몸을 싣는 법입니다. 저는 급기야 저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 혼자만의 책임으로 여겨왔던 것들 중에 사회구조적인 악함이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던 것이죠. 개인 구원론에 천착한 사적인 복음은 일이 잘 풀리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요새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제가 낮은 곳에서 바라본 그 요새는 터무니없이 견고하기만 했습니다. 오로지 선택된 자들만이,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만이 솜사탕을 뜯어먹으며, 현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손 들고 자기감정에 취해 찬양이랍시고 떠들어대는, 적당히 낭만적인 곳이었죠. 그 안에 있을 땐 전혀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밖에 나와서 보니 많은 것들이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수함이라 여겼던 것들이 옹졸함과 편협함이었고, 그것은 풍성한 조화로움이 거세된 상태의 암세포처럼 그저 획일성만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천국인 것 같았던 그곳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보이지 않았죠. 오로지 ‘잘 되는 나’의, ‘잘 되는 나’를 위한, ‘잘 되는 나’에 의한 나라였으니까요. 타자가 배제된 곳에 어찌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곳에 거룩함이란 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신학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교만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더 이상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로는 저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100권이 넘는 신학/신앙/영성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대형교회 목사나 유명한 선교사들의 설교/간증집에서 멀어지더군요. 지금의 저에게 영향을 준 신학자를 두 사람 꼽는다면, 영국의 크리스토퍼 라이트, 한국의 김근주 교수입니다. 그들의 책을 거의 다 읽었죠. 물론 이 두 분의 신학이 가장 훌륭하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이었죠. 저의 목마름이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거룩함이란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은 무엇인지, ‘지금, 여기’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등등의 굵직굵직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마음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가뭄이 끝난 후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100권 정도 읽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비슷한 이야기들의 변주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로서는 이미 그 정도면 충분히 포화상태에 이르렀던 것 같았습니다. 더 깊이 알기 위해선 정규수업이랄까 하는 기본적인 준비운동이 필요할 텐데 그런 것들을 전혀 갖추지 못한 일반인에 불과한 저에게는 더 이상 무언가를 새롭게 느낄 만한 감각이 없었죠. 이렇게 해서 제가 선택했던 다음 방향이 문학이었습니다. 신학을 읽다가 그것이 지닌 2차원적인 특성 (신학교에 발도 못 디딘 저에게만 해당)에 단조로움을 느끼고 3차원, 4차원, 혹은 그 이상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풍성한 문학적 상상력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헤세와 도스토예프스키, 카잔차키스와 루이스 등 고전문학 작가들의 세상을 맛보기 시작했던 것이죠 (brunch.co.kr/brunchbook/lookinginside).

 

저는 그 문학작품 안에서 신학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신학 책이 제공해주지 못했던 깊이와 풍성함을 문학은 넉넉히 제공해 주었죠. 헤세를 통해 자아의 발견, 성찰, 분열, 성장, 성숙의 과정을 다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었고,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처절한 민낯과 그 가운데에도 비치는 한줄기 구원의 빛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카잔차키스를 통해 자유함과 성육신의 문학적 개념을 맛볼 수 있었고, 루이스를 통해 문학적 상상력이 설득력을 입고 신앙을 확고히 다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주제 사라마구, 한강 작가 등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인간의 욕망과 본성 등을 풍성히 맛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책만 읽어서는, 그리고 신학 책 100권을 읽어서도 전혀 맛볼 수 없는 만찬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 하여금 신학을 먼저 읽게 하시고 문학을 접하게 하신 이유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의 저자 이정일이 이 책에서 꾸준히 강조하고 있는 내용, 즉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문장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에 대한 산 증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문학과 신학을 전공한 저자의 깊은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신학만 전공해선 볼 수 없는 것들, 문학만 전공해선 다룰 수 없는 것들이 이 책에선 여유 있게 다뤄집니다. 신학 책에서 자주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건조하고 딱딱한 문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대신 두 가지 눈을 모두 가진 저자의 예리하면서도 풍성한 통찰이 문학이란 옷을 입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마음을 울립니다. 문학을 더 읽고 싶게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성경을 제대로 다시 읽고 싶게 만들기도 합니다. 유연해진다고나 할까요? 이 책을 읽고 나면 가지게 될 느낌 중 하나는 아마도 유연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이 책을 단조롭고 기계적인 신앙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계시거나, 규칙과 형식에 얽매여 신앙의 깊이와 풍성함을 느끼지 못하고 계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문학적 상상력과 유연함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저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문학은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획일성이 아닌 풍성한 조화로움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됨'의 진정한 의미라는 사실도 저는 문학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 타락의 실체, 그 부끄러운 민낯, 그 나약함, 한계를 가진 인간의 숙명 등도 저는 문학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문학은 많은 경우 허구를 포함하지만, 그 허구는 종종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며, 자주 깊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저는 압니다. 문학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깊고 풍성한 눈을 문학을 통해 갖출 수 있음도 저는 조금이나마 맛보고 있습니다. 사영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가 하신 일이 그렇게 단순하고 낭만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압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문학이 아니면 어찌 이해할 수 있을지 저는 이제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11장까지 이어지는 인간의 타락된 모습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이유도 창세기에 사용된 문학적인 장치 때문이듯, 내러티브가 주는 풍성함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면서도 훌륭한 문학작품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니까요. 저는 문학적 상상력도 어쩌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감성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영역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알아갈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주는 것이죠. 저자의 말처럼 문학을 통해 깊이와 감성을 가진, 풍성한 깊이를 가진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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