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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 심연에 있는 쾌락.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울과 절망? 수치와 모욕? 소외와 단절? 모두 아니다. 그런 것들은 얕은 곳에 위치해 있어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모습일 뿐이다.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가장 깊은 곳엔 ‘쾌락’이 있다. 그 쾌락의 맛을 본 작품 속 주인공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떤 은밀한, 비정상적인 비열함에서 오는 쾌감을 느꼈고, 어떤 기분 나쁜 뻬쩨르부르그의 밤에 방구석으로 돌아와서는 오늘 또다시 추잡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리고 저지른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했으며, 이것으로 인해 내면적으로 은밀하게 자신을 갉아먹고, 갉아먹으며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쓰라린 비애는 어떤 치욕스럽고 저주받을 달콤함으로 바뀌었고, 드디어는 결정적이고 진지한 쾌락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다. 쾌락으로, 쾌락으로 말이다! 당신에게 설명하겠다. 이 경우의 쾌락이란 바로 자신의 비하를 너무나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다. 즉 당신 스스로 마지막 벽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끼며, 이것이 추잡한 일이지만 달리 방도가 없고, 이미 당신에게는 출구가 없다는 것, 그리고 결코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제목에 등장하는 ‘지하’는 지상 아래의 공간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은유로 읽어야 한다.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주무대인 ‘지상’에 대비되는 의미로써, 소외되고 단절된 자들에게 비정상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어두운 은닉처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스스로를 소외시켰다. 안타깝게도 책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스스로 깊은 몽상에 빠진 나머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못한 채 혼자 섬을 이루며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회 부적응자다. 그리고 그는 하급관리로서 가난은 그의 필연적인 친구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은 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 ‘분신’의 주인공이 떠오르고, ‘죽음의 집의 기록’, ‘미성년’의 주인공도 떠오르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드미트리도 생각나게 하는 인간의 심리 묘사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서사가 거의 없고 거의 주인공의 철학적, 심리학적인 독백으로, 그것도 자신의 이율배반성을 스스로 감지하고 있어 괴로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비뚤어지고야 마는, 그래서 나름대로의 ‘쾌락’을 느끼곤 하는 독백으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 작품이라 할 수 있는 5대 장편소설이 탄생하기 직전에 써진 그의 중기 말의 작품이기도 하다.

 

자존감 없는 사람이 자존심에 집착하듯,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 속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열등감’ 이면에 흐르는 ‘비뚤어진 우월감’을, 유리 거울 깨지듯 ‘약한 정신성’ 이면에 흐르는 ‘잘못 강화된 의식’을, 늘 모욕받는 듯한 ‘약자 혹은 패배자의 모습’ 이면에 흐르는 ‘추악한 허영심과 비열한 지배욕과 탐욕’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읽고 있노라면 씁쓸한 기분을 가뿐히 넘어서게 되고 곧 어두움과 불쾌감마저도 느끼게 된다. 인간의 공감 능력에도 역치가 있어서 그 이상의 자극이 가해지게 되면 더 이상 공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상황이 되고, 급기야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는 행동을 통해 그 상황을 피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이런 면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탁월함을 보여주는 작가가 틀림없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감정의 곡선을 어느 정도 따라가다가 적당한 선에서 멈추게 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에겐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 그는 기어이 끝까지 가고야 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길의 끝에서 인간 본성의 민낯을 낱낱이 발려 내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서는 예리한 검에 깊이 찔린 상처를 맛 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처럼, 5대 장편으로 그가 나중에 만발하기 이전의 작품들을 읽어나갈 땐 특히 각오를 하고 읽으면 좋겠다. 함부로 덤비다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오해할 여지가 충분히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것처럼, 인간 본성의 민낯을 맨눈으로 구경하고 싶다면 나는 그 어느 작가보다도 도스토예프스키를 권하고 싶다. 그래도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신뢰가 생긴 이후에 읽으면 좋을 듯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분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17746821603406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17986684912752

10.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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