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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과 개인의 행복: 그 조건과 이유, 갈등과 균형에 대하여.

레프 톨스토이 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한참을 망설였다. 아직도 책상 위에는 쌓으면 하나의 큰 벽돌이 될 만큼 두꺼운 책 세 권이 층층이 놓여 있고, 눈 앞에 펼쳐진 흰 바탕의 워드 파일은 세 시간째 커서만 깜빡이고 있다. 무언가를 써야만 한다는 기분 좋은 의무감에 취해 있으면서도, 나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컴퓨터 스크린만 바라보고 있다. 

마흔 언저리,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 여정에서 나는 꽤 많은 문학작품을 만났다. 그중 나를 꼼짝 못 하게 매료시킨 작품을 꼽아보면 그리 많진 않다. 모든 문학작품은 저마다 고유한 사상과 정서를 담고 있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그 무언가를 깊숙이 건드려 독자를 읽는 내내 압도하는 작품은 결코 흔하지 않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지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 그리고 제한된 시공간 및 언어에 필연적으로 갇힌, 그러나 탁월한 통찰력과 필체를 가진 작가 간의 운명적인 만남은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을 탄생시키기 마련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나는 나를 압도한 소수의 문학작품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이다.

문학고전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이름만 들어본 작품도 많다. 그 존재와 가치를 안다 하더라도 본인은 정작 읽어보지 않은 작품이 많다는 얘기다. 보통 이런 작품은 난이도보다는 분량에 의해서 결정된다. 읽고 싶은 충동과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만드는 상승효과도 책의 분량에 의해 쉽게 제압되고 마는 것이다. 분량은 곧 시간이고, 시간은 곧 여유이며, 여유는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좀처럼 만들어내기 어려운 물리적 투자로 이어지기에,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늘 희생당하며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스스로 희생하기는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은 이런 작품을 읽기 위해 자신의 며칠 안 되는 소중한 휴가를 사용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이런 작품은 또다시 책장의 한 구석을 묵직하게 차지한 채 마치 오래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처럼 마음의 부담거리로 남게 되는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현대인의 서글픈 일상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읽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같은 이유였다.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그럴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하지만 올해 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은 이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아내와 반강제적으로 떨어진 상황, 아들의 2주 겨울방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된 휴가, 그리고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한 락다운. 손발이 묶인 것처럼 답답한 상황이 오히려 이런 대작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덕분에 1,600 페이지의 책을 5일에 걸쳐 읽어냈다. 시원하게 숙변이 제거된 듯한 해방감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다 읽고 나서야 고백하는 말이지만, 이 대작을 완독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위에 언급한 특수한 외적 환경이기보다는 이 책에 내재된 고유하고 압도적인 아우라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이 작품에 압도되지 않으면 다 읽어내기가 결코 만만찮은 작품이라는 의미도 되고, 누구든지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압도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의미도 된다. 대작을 맛보고 경건한 마음이 되어 답례로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느끼는 이 신성한 의무감을 나는 사랑한다. 이 기분을 허투루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 살면서 아주 드물게 마주치는, 예기치 않은 기쁨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조그만 감상문으로 이를 기념하기로 한다.

줄거리를 요약해 볼까, 인물 분석을 시도해 볼까, 아니면 작품 속에서 크게 대비되는 두 가정을 비교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머릿속이 가득 차기도 했었다. 그러나 책 뒤에 붙어있는 해설에서 “이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에 대해 연구된 저서와 논문만을 모아도 도서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는 부분을 읽고 나자마자 나는 어설픈 분석적인 접근은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건 그저 내가 느낀 바를 담백하게 적어 나가는 것밖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 가지 관점으로 내 감상을 간략하게 풀어볼까 한다. 하나는 ‘가정의 행복’, 또 하나는 ‘인간 (개인)의 행복’에 대한 관점이다.

1. 가정의 행복.

이 작품의 문학동네 번역본은 총 세 권으로 나눠져 있다. 1권은 1-2부, 2권은 3-5부, 3권은 6-8부로 각각 구성된다. 1권을 읽으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연애, 불륜, 갈등, 이혼, 파멸 등, 천박한 3류 소설에 어울릴법한 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막장 드라마로 유명한 한국 사람 아닌가. 셀 수 없이 많은 드라마에서 이미 써먹을 대로 써먹은, 그래서 이젠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너덜너덜한 싸구리 연애소설에 나는 전혀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그 따위 책을 읽느라고 나의 귀중한 휴가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나 이 작품이 단지 톨스토이라는 거장의 이름값과 ‘안나 카레니나’라는 대작의 유명세만을 등에 업고 있는 ‘빈 강정’은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2권에 들어서자마자 속도가 붙었다. 가장 많은 분량 (약 600페이지)을 차지하는 2권을 가장 빨리 읽어버렸다. 그리고 3권 앞부분에서 잠깐 속도가 늦춰졌다가 중간부터 끝까지 다시 내리 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7부에서 느껴졌던 여러 불길한 조짐,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연상케 하는, 안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분열적인 독백을 읽고 있을 땐 나는 심장이 바싹 조여드는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쾅” 하고 실현되어버린 안나의 악몽, 안나의 죽음을 목도했을 땐 한동안 책을 덮고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어떤 거대담론을 논하지 않는다. 물론 역사와 1870년대 러시아 시대 정황을 숨김없이 드러내지만, 저자는 한층 눈을 낮추어 지극히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주제를 다룬다. 주제도 한 가지가 아니다. 오히려 백과사전식이랄까. 여러 가지 주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심 된 주제를 하나 꼽으라면, ‘가정’, 혹은 ‘가정의 행복’, 좀 더 풀면 ‘가정의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대답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소설을 여는 첫 문장이 이 주제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소설 전체가 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추측건대, 이 작품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유명한 첫 문장을 들어본 사람은 꽤 많을 것이다. 문학동네 버전은 다음과 같다. 이어지는 문장은 출판된 여러 영문 번역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는 영문 번역 덕분에 이 문장의 의미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첫 문장의 해제라고 볼 수 있는 1,600 페이지의 방대한 드라마는 주로 두 가정을 비교하며 전개된다. 한 가정은 안나와 브론스키, 또 한 가정은 키티와 레빈이 주축을 이룬다. 전자는 공식적인 부부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인 결혼이 불가능하다. 알다시피 안나는 알렉세이라는 남편과 세료쥐아라는 아들이 있는 가정을 뒤로하고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브론스키와 결혼을 하려면 알렉세이와 먼저 이혼해야 한다. 그러나 끝내 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안나에겐 죽음이 이혼보다 먼저 찾아왔다) 후자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톨스토이는 이 두 가정, 조금 더 범위를 좁히자면, 전자의 안나와 후자의 레빈에게 초점을 맞춘다. 

일견에 안나와 레빈의 삶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치닫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부와 명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재력가이자 전도유망한 정치인 남편과 어린 나이에 결혼한 안나는 소설 처음부터 외적인 모든 걸 다 갖춘 채로 등장한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남자들을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남자는 결혼 유무를 떠나 고개를 돌려 다시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미모를 가진 여자로 그려진다. 반면, 레빈은 상류 사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 속에 만연한 허영과 허식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경계하고 있으며, 사교계 안에서 판에 찍은 듯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혼자 철학적으로 깊게 사유하길 좋아하고, 도시에서 흥청망청 불필요한 돈을 쓰며 시간을 축내는 생활보다는 시골에서 정직하게 땀 흘리며 노동하는 편을 선호하는 순진하고 우직한 남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상황은 점점 변해간다. 안나는 우연히 기차에서 브론스키를 처음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에게 모든 걸 다 제공해주고 안전한 요새가 되어주었던 가정을 등지고 도덕, 윤리, 그리고 당시 사회문화와 사교계 풍습의 따가운 시선을 과감하게 물리친 채 브론스키와 함께 떠나 단 둘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했던 사랑은 점차 집착이 되었고, 그녀가 추구했던 자유는 그녀를 더욱 구속하고 말았으며, 그녀가 남들 앞에서 자랑했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은 불행의 전초전일 뿐이었고 이는 곧 파멸을 가져왔다. 한편, 레빈은 용기 내어 키티에게 했던 청혼이 거절되자 잠시 좌절에 빠진 채 묵묵히 사유와 노동 위주의 생활에 침잠했지만, 곧 키티의 진심을 알게 되어 겸허한 자세로 결혼에 성공하게 되며 시골에서 이웃과 가족, 친지를 진심으로 도우며 소박하지만 단란하고 칭찬받는 가정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안나와 레빈의 대비는 가정의 행복이 결코 초기 조건만으로 단정 짓거나 예측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과정 속에 나타나는 역동적인 움직임의 총합임을 우리에게 조용히 일깨워준다. 

그러나 아무리 예측할 수 없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관건이라 하더라도, 소설의 결말까지 이어지는 전체 흐름에 기반할 때 아마도 저자 톨스토이는 자신의 첫 문장의 의미를 뒤집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불륜의 행각이 궁극적으로 안나와 안나 가정의 불행을 가져왔으며,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으나 그것을 이겨내고 정직함과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던 사랑이 레빈과 레빈 가정의 행복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첫 문장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불행한 가정이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 한 게 아니라, 불행으로 치닫는 가정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공식에 의거한 일정한 (고만고만한) 수순을 밟는 것처럼 소설의 결말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의 첫 문장 뒷부분은 “불행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한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 인간 (개인)의 행복.

결혼을 경험해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결혼 전과 후는 엄연히 다르다. 외적인 부분은 물론이거니와 내적인 부분 역시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중 이 작품과 관련해서 ‘행복’이라는 관점으로 결혼 전후를 비교해보면 부인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정도의 차이’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전혀 상반되는 입장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가령, 불륜과 같은 사건이 개입될 때이다. 불륜이라는 단어는 결혼 전이 아닌 결혼 후에만 적용된다. 마음에 드는 매력적인 상대와 사랑에 빠지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일 만큼 아주 근본적인 욕망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똑같은 행위가 결혼 후에 발생한다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내려진다. 윤리, 도덕의 문제와 신뢰, 책임감의 문제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안나가 선택한 사랑과 행복이 궁극적인 파멸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그러나 저자가 안나를 죄인이나 악인으로 단정 짓고 벌하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 해나가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작품은 진짜 3류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안나의 괴로움과 내면의 갈등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유도한다. 결국 불행이 되어버린 행복(?)을 선택하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안나의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우리는 가없는 연민을 느끼며 자연스레 그녀의 내면에 젖어들게 된다. 안나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갈등과 혼란에 빠져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이 책의 독자들은 아마도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안나의 자리에 위치시키며,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불륜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이와 같이 안나의 내면에 우리가 깊이 공감하게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작가 톨스토이의 전적인 힘일 것이다. 거장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읽는 재미 또한 이럴 때 극대화된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알렉세이가 안나와 이혼을 하고 아들의 양육권까지 안나에게 넘겼다면 끝나는 문제 아니냐고. 그랬다면 안나는 이혼녀라는 타이틀로 인해 잠깐 동안의 수치만 견뎌내면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 톨스토이는 이런 면에서 명확히 선을 그을뿐더러 (생각해 보라. 불륜을 행한 아내에게 순순히 이혼을 허락하고 위자료도 주면서 아들 양육권까지 넘겨주는 남편이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은가), 남편 알렉세이를 기독교인으로 그리면서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자비와 긍휼을 안나에게 베풀며 그녀를 용서하고 그녀에게 돌아올 기회를 허락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이 설정은 안나가 그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내렸던 그 불행한 선택이 도를 넘어서는 것이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영역의 그릇된 선택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마찬가지로, 안나를 결국 자살이라는 끔찍한 행위로 몰고 가는 구도에서도 저자는 안나의 선택을 결코 옹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죄와 같이 무겁고 어두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우린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안나와 대비되는 레빈이라는 인물은 아무 여자에게나 집적거리는 사교계의 흔한 남자들과는 남다른 생각을 가진 보기 드문 스타일의 소유자인데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표현할지도), 사랑과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레빈은 안나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한다. 저자가 소설 시작부터 안나는 모든 것을 가진 유부녀로 등장시키는 반면 레빈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미혼남으로 등장시키는 구도 역시 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가정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을 선택한 안나는 점점 모든 걸 잃게 되고, 함부로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한 여자만을 조심스럽게 사랑하는 레빈은 시간이 갈수록 의심 없는 사랑을 얻고 행복을 누리게 된다. 도덕, 윤리적인 문제가 안나로 인해 도드라졌다면, 신뢰, 책임감의 문제는 레빈으로 인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신론자였던 레빈은 소설 뒷부분에서 어릴 적부터 각인된 기독교적인 믿음이 자신의 이성을 넘어서는 영역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이유가 외적인 어떤 것, 이를테면 돈이나 명예를 위한 게 아니라, 내적인 어떤 것, 즉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영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한때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허무한 상념에 빠져 있기도 하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여러 철학책과 신학 책을 읽어오던 그였지만, 소설의 마지막에서 레빈은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는 인간의 삶이라도 삶의 모든 순간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의심할 나위 없이 선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레빈의 깨달음을 통해 톨스토이는 아마도 ‘가정의 행복’이라는 관점보다는 ‘개인의 행복’, 아니 ‘모든 인간의 행복’, 즉 모든 인간이 진지하게 스스로 질문해서 얻어야 하는 답은 남녀 간의 사랑과 같은 인간적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존재와 선의 의미를 발견하며 인생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과 같은 인간 너머의 영역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해석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에서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로 제대로 들어와 보니, 마치 외경을 읽다가 정경을 뒤늦게 접한 경우와 비슷한 기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직구를 먼저 배운 이후에 변화구를 배우는 게 순서이고, 정석을 먼저 배운 이후에 지름길이라든지 응용 버전을 접하는 게 상식일 텐데, 나는 톨스토이 이전에 도스토예프스키를 먼저 접했으니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으로 말미암아 나는 톨스토이의 작품 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부분에 조금은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고, 텍스트 이면에 흐르는 콘텍스트와 저자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는 주관적인 해석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익숙한 독자인 내 눈에 읽힌 톨스토이 고유의 필체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문장 몇 개를 소개해볼까 한다. 소설의 첫 문장이 소설 전체를 압축하듯, 이 문장들은 모두 각 꼭지를 여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작은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인간이 길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없다. 특히 자기의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살고 있는 것을 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307페이지)

“가정생활에서 무엇인가를 꾀하기 위해서는 부부 사이에 완전한 분열이나 혹은 사랑의 일치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부관계가 애매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에는 어떠한 계획도 실행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싫증이 난 생활을 그대로 몇 해째 계속하고 있는 부부가 꽤 있지만, 그것은 모두 완전한 분열도 일치도 없기 때문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69페이지)

다음은 레빈이 스스로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이다. 톨스토이 자신의 깨달음이 반영된 게 아닐까 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데까지 다다른 것은 과연 이성에 의해서였을까?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곧잘 들었던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나의 마음에도 꼭 맞았으므로 기꺼이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일깨운 것은 누구였을까? 이성은 아니다. 이성은 생존을 위한 투쟁과, 자기 욕망의 만족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을 압도할 것을 요구하는 법칙을 일깨울 뿐이다. 이것이 이성의 결론이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성이 일깨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합리하니까.” (485페이지)

이렇듯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가정의 행복과 인간 (개인)의 행복 사이의 갈등과 균형, 그리고 각각의 참 의미, 목적, 이유 등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21세기 현재 우리들도 충분히 공감하고 또 실제로 겪고 있는 일들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대작은 모두 개별적인 어떤 평범한 사건을 통해 보편적인 무언가를 깊이 건드려서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 같다.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로운 한 해의 첫날, 나는 이렇게 평생의 숙원 하나를 푼다. 방대한 작품을 대할 때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이 감상문이 대작의 명성에 흠집 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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