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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위한 다리.

 

김진혁 저, ‘순전한 그리스도인’을 읽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어 인간의 불완전성을 단박에 증명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나마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신비한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육체에 갇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인 신을 인지하고 알아가는 과정도 우리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상력은 이미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암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이성과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는 신비한 능력, 상상력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심인물인 루이스를 설명하기에 없어서는 안 될 키워드가 됩니다.

 

상상력 없는 이성, 혹은 상상력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이성은 독단의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성의 목적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들을 관찰, 표현, 비교, 분석하여 어떤 명제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가슴 깊은 곳의 공허함을 인지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채울 수는 없을 것이며, 저 너머를 이루고 있는 비명제적 지식에 대해서 꿈꾸거나 생각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소망이 사라진 삶을 잠시만 생각해 보더라도 그곳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수학으로 이루어져 있고 예측 가능하며 신마저도 수학적으로 사유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끔찍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의식 세계가 무의식 세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비하면 정말 티끌 같이 작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작디작은 이성의 왕국이 인간과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거나 주장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인간에게는 상상력이 주어졌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불완전성이 불평, 불만의 이유가 아니라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첫 인간이 그랬듯, 자기중심적인 교만과 독단에 빠진 채 모든 선과 악을 자신의 유익에 따라 판단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니까요. 상상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성과 상상력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신앙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깨달아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택한 방법은 수만 가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짐 월리스에 따르면, 회심은 회개와 다릅니다. 어디인가로부터 (from) 어디인가로 (to) 돌아서는 커다란 흐름을 회심이라고 정의할 때, 그는 회개는 ‘어디인가로부터’ 돌아서는 (turning from) 첫 과정일 뿐이고, ‘어디인가로’ 돌아서는 (turning to) 과정은 신앙이라고 정의합니다. 진정한 회심이란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것에서 돌아서는 회개를 거친 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회개 후 실제로 발을 내딛는 행위와 그 여정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회심을 했다는 그리스도인 중에 여전히 이전과 같은 삶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회심이 아닌 회개만을 경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회심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어떤 특이적인 사건이 아닌 새로운 방향성이 생긴 삶을 살아내는 운동성을 가진 긴 여정과도 같으니까요. 즉, 진정한 회심은 회개의 순간이 삶으로 녹아들어 신앙을 지속하고 있을 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김진혁은 루이스가 세 번의 회심을 경험했다고 적습니다. 제가 볼 때, ‘세 번의 회심’이라는 표현보다는 ‘세 단계의 회심’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전자는 마치 동일한 회심을 세 번 반복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후자로 표현할 때 비로소 저자가 말하는 바, 즉 상상력의 회심, 이성의 회심, 그리고 신앙의 회심, 이렇게 세 단계를 거친 회심을 통해 루이스가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해 없이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회심기가 축약된 그의 회고록 ‘예기치 못한 기쁨’을 보면,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웬 회심? 하면서 의아해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소년 시절 무신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배교를 행했던 것이죠. 이는 태어날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지게 되는 신앙이 그 사람의 평생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루이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침례교단이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요. 루이스 스스로도 자신이 무신론자가 되었던 계기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어떤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 아니라, 10대 초반 그의 배교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저자가 간파한 대로,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 기숙학교 내 비합리적인 분위기에서의 생활 등이 얽히고설켜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그의 배교를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을 객관적 대상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 혹은 취향이라고 여기게 되면서 그는 무신론으로 이끌려 갔다.” 아주 간결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단순히 세상의 많은 신에 대한 해석 중 하나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모든 것의 중심사상이 되는 것이니까요.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되는데 어찌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자 김진혁이 언급한 ‘세 단계의 회심’에서 중요한 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루이스가 머리가 크면서 신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는 무신론자가 되어버렸고, 그가 다시 역사에 길이 남을 기독교 변증가, 아동 문학 작가, 혹은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작가 등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진정한 회심의 과정이 있었을 테고, 그 과정이 세 단계로 이뤄졌다는 해석에서 저는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으로 선정된 ‘순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회심 과정의 윤곽을 잡아주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저자가 파악한 세 단계가 순서대로 밟아져야 진정한 회심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전도나 선교라는 명목으로 교회 주보를 돌리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행위, 혹은 사영리 같은 영접만을 목적으로 제작된 전도지를 돌리면서 달달 외운 대로 전도대상자 앞에서 떠드는 행위의 방향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회심자를 탄생시키는 데 얼마나 기여를 할지 의문이 들기도 했거든요. 혹시 상상력의 회심, 이성의 회심의 단계 없이 곧장 신앙의 회심만을 강조하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앞의 두 단계를 빼먹은 신앙의 회심만으로는 불신자들 영접시킨 횟수는 증가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회심자, 다시 말해 진정한 그리스도인 혹은 예수의 제자를 찾아내고 돕는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짐 월리스의 정의를 다시 한번 빌리자면, 회개에 그친 ‘무늬만 회심자’를 양산하는 전도가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는 상상력과 이성의 회심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상상력 따위는 이성이 작동하는 데에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상상력이란 저자가 표현한 대로 경험의 지평에 속하는 현실의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보이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전달하는 힘을 가지지요. 우리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찌 감히 인정하고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떠올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연한 질적 차이가 존재하는 한,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흔적을 더듬어 알아가는 과정이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진 사명이자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무수한 사건 중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의 상상력 없이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사건일 것입니다. 루이스는 성육신 사건을 두고 신화 같아 보이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 사건 때문에 역사적 이성과 신화적 상상력 사이에서 굳이 양자택일할 필요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성육신 사건은 신화가 역사가 되어버린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신화라는 단어에 굳이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화의 개념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겪었던 시대, 바르트에 의한 신정통주의의 등장으로 자유주의에 큰 폭탄이 떨어져 하나님의 내재성보다는 초월성을 다시 강조하던 시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등장과 그에게 영향을 받은 불트만에 의한 성경의 비신화화 작업이 행해지던 시대를 함께 살아내며 낭만주의를 옹호하고 알레고리를 사랑하며 비신학자로서 순전한 기독교를 변증하고 내러티브를 이용해 상상력의 회복을 통해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지향한 루이스가 가졌던 신화의 개념과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인트는 신화에 있지 않고 상상력에 있다는 것이죠. 

 

최근에 출간된 이정일의 저서에서 강조되듯 저 역시 문학이 우리의 신앙을 더 깊게 만들어준다고 믿습니다. 이 역시 상상력이라는 기반된 일이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상상력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아니 그 이전에 인간에게 허락된 보석 같은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이성에 천착한 인간에게, 혹은 이성을 신앙의 대척점에 놓고 신앙만을 강조하는 인간에게 상상력은 예기치 못한 멋진 다리가 되어 둘 사이의 아름다운 조화를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루이스의 삶과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 책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전보다 더욱 풍성해지길 소망합니다. 다시 한번 상상력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시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098756400169131

2. 고통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26994814011956

3. 헤아려 본 슬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38735802837857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71812539530180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59914580719975

6. 순전한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47418798636218

7. 시편 사색: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816749868369777

8. 순례자의 귀향: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4795460524929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8591545145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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