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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현장을 만날 때.

이병훈 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를 읽고.
-책의 부제: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 책은 노어노문학과 출신의 저자 이병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그의 작품이 남긴 자취를 따라 러시아 곳곳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 성격의 에세이다. 내가 지난 2년 간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그의 초중기 작품 5권 (‘가난한 사람들’, ‘분신’, ‘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로부터의 수기’, ‘노름꾼’)을 읽어온 이유도 어쩌면 이 책을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문학에 대한 조금 더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이해의 깊이는 아무래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보다는 읽은 사람에게 더 진하게 느껴질 것이다. 누군가의 감상문이나 서평을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감동의 깊이가 작품을 읽기 전의 사람보다는 읽은 후의 사람에게 더 진하게 전달되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작품을 깊이 읽고 갖게 되는 공감대는 글쓴이가 쓴 “아…”라는 짧은 감탄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텍스트 이면에 숨어있는 의미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법이다. 하물며 평소에 존경하는 대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숨결이 묻어있는 공간을 사진으로 보며 느끼게 되는 감동과 울림은 오죽하겠는가.

책은 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따라가며 진행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태어난 집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가 임종을 맞이한 집까지 이 책의 저자는 거의 모든 현장을 방문했다. 심지어 그는 이 책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까지 썼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살았다.” 나에겐 이 문장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나 역시 열 권의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그 삶이 펼쳐졌던 시공간이 늘 궁금했다. 그런데 언제나 상상만으로 끝나고 말던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살았다니! 남모를 부러움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감쌌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동시대인들이 묘사한 현장에 직접 가보고, 역사적 기록들을 확인하면서 거기에 현대적인 감각과 의식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고 적고 있다. 세상에는 이미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이 많지만 거기서 다루지 않은 자료를 처음 우리말로 소개한 점도 이 책의 새로움이라고도 밝힌다. 모스크바, 빼제르부르그, 옴스크, 스따라야 루사 등, 도스토예프스키가 거주했던 거의 모든 장소를 탐방하며 저자가 온몸으로 느꼈을 가슴 벅찬 울림을 떠올릴 때마다 내 가슴도 같이 뛰었다. 잠시나마 나도 러시아를 다녀온 기분이었다.

특히,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집, 첫 장면을 이루는 그가 걷던 거리, 그가 도끼 살인을 저질렀던 전당포 노파의 집, 소냐의 집, 등에 대한 실제 공간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장면에서 나는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우리가 소설이 아니라면 어찌 도끼로 사람을 죽이려는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겠으며, 어찌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졌던 잘못된 사상이 발전하고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지 이해하겠는가. 그런데 저자는 내가 텍스트로 간신히 이해했던 정도를 훌쩍 넘어 실제 현장에서 ‘죄와 벌’을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과연 그 맛은 어떨지 생각하며 내 심장은 이 장면에서 유난히 쿵쾅거렸다.

저자 덕분에 알게 된 여러 사실도 흥미롭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빼쩨르부르그에 살면서 스무 번에 걸쳐 거처를 옮겼는데, 그 주소지들의 묘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그가 살았던 집들이 대부분 길모퉁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여기에 대한 해석을 내놓는데, 다음과 같다. 나는 읽고 머리가 끄덕여졌다. 

“그에게 모퉁이 방은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를 관찰할 수 있는 확대경이었다. 그는 모퉁이 방에 앉아 러시아 사회의 불행한 참상, 즉 민중들의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삶을 목격했고,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교차점을 찾기 시작했다.”

이 해석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이 통속적이고 너무나 적나라한 리얼리즘이면서도 언제나 저 너머로부터 비치는 구원의 빛줄기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해석 역시 나는 공감이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기독교 사상을 절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의 참혹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으며, 길거리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중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것을 현실 너머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교차로의 끄레스뜨, 즉 교회 십자가였다. 이런 사실을 반증하듯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집 근처에는 예외 없이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나 교회가 있다.”

이런 발견은 책만 읽어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사실이다. 텍스트에 적혀 있지 않는 콘텍스트이며 아무리 그의 작품을 책상에서 연구했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현장에 직접 가서 관찰해야만 얻을 수 있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 책을 읽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사실을 발견하고 저자는 얼마나 전율이 돋았을까 생각하면 나도 흥분이 된다. 아마도 다시 텍스트를 읽으면 분명히 다르게 읽힐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백치’에 등장하는 문구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이없는 사건에 휘말려 감옥살이를 경험했는데, 그때 러시아 정교가 그의 사상과 예술의 근원적 힘이 되었다고 저자는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감옥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 성서였다는 점은 이 해석을 충분히 지지하고도 남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더 나아가 설령 누가 내게 그리스도가 진리 밖에 있으며, 실제로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할지라도, 나는 진리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남는 쪽을 택할 겁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고 용감한 존재라고 했다. 이것은 ‘백치’에서 재현된다. 그는 ‘백치’의 주요 사상은 완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자 ‘백치’의 주인공 미쉬낀 공작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작품 속에서 아름다움의 형상으로 두 사람이 소개되는데, 하나는 나스따시야, 다른 하나는 미쉬낀 공작이다. 이 두 아름다움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일부러 대비시키고자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해석에 나는 수긍이 갔다. 그는 주인공 미쉬낀을 내면과 외면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으로, 나스따시야를 외면의 아름다움만 갖춘 미인으로 설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작품 속에서 내면이 아닌 외면만 아름다웠던 나스따시야는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파멸시킨다. 

저자는 이 ‘아름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9세기 중후반기를 살아내며 겪었던 시대적 정황 속에서 생각했던 ‘구원’의 통로는 ‘아름다움’이었고, 그 아름다움은 외면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이며, 이는 진창 같이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그 구원이 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상의 아름다움을 선과 악의 경계선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무정형의 아름다움은 선한 정신에 의해 평정을 되찾을 때만 세상에 구원의 빛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삶은 아름다움이 실현된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가운데에 있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 천재성이 결실을 맺은 1860-1870년대는 19세기 러시아 역사에서 대규모 사회개혁과 대중적인 계몽운동이 발생했던 시기였다. 다윈의 종의 기원의 러시아판이 1865년에 출간되었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러시아판은 1872년에 출간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에 태어나 1881년에 죽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5대 장편소설은 1866년부터 1881년에 모두 써졌다. 러시아의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급변하는 세계 정황 한가운데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대작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그 당시 대문호 톨스토이도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점도 도스토예프스키 같이 괴물 같은 작가가 탄생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대작가는 개인의 노력과 열심 이외에 시대가 만들어내는 열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또다시 하게 된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신학과 철학과 문학에서 걸출한 작가들이 등장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결혼을 두 번 했다. 알다시피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작품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두 번째 아내 안나에게 바쳐진다. 저자는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의 차이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평생 간질을 앓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번의 결혼식날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런데 두 여인의 반응이 달랐다. 다음과 같다. 나는 안나에게 다시 고마움을 느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두 번째 부인은 떨고 있는 남편의 몸을 끌어안고 그의 영혼을 어루만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81년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쓰고 임종을 맞이한 집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이 감상문을 마무리지을까 한다. 애잔한 감정이 인다.

“그의 집은 건물 2층에 있었는데, 방 여섯 개와 책을 쌓아두는 큰 창고, 현관 그리고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문 일곱 개가 꾸즈네치니 거리를 향해 나 있고, 현재 대리석 현판이 붙어 있는 곳에 그의 서재가 있었다. 지금은 막혀 있는 건물의 정문 출입구는 서재 옆에 있는 거실 밑이었다. 이 집은 현재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집에서 그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썼고, 임종을 맞이했다.”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분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17746821603406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17986684912752

10. 노름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7547675916374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94599463918140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이병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024470600931025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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