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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전환: ‘영웅’에서 ‘아무개’로.

박양규 저,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를 읽고.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양팔로 삼고 생물학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러 다양한 생물학 분야는 물론 화학과 물리학, 철학과 신학을 함께 공부한다. 아니, 해야만 한다. 한 분야의 박사라고 해서 그 분야만 공부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흔히들 학문이 깊어질수록 그 학문의 순도가 점점 높아져서 궁극적으로 100%에 도달하는 지점이 가장 깊은 곳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학문의 깊이는 좁고 이기적인 지식으로 무장된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그 깊은 곳엔 다른 학문과의 원활한 소통의 창이 존재한다. 아니, 그러한 창이 없다면 깊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람들이 지어 놓은 학문의 경계도 어쩌면 단순한 무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통념과는 달리 학문은 깊어질수록 경계를 지운다. 깊이는 좁지 않고 넓다. 풍성함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여러 다양한 학문 간 교류와 통섭이 이 시대의 트렌드가 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한 우물만 파는 이기적인 시대는 지났다. 멀리 봐야 하는 목적도 모른 채 무조건 높이 날기 위한 갈매기의 꿈은 단조롭고 무의미하다. ‘한 우물 파기’, ‘높이 날기’ 등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사회적 영향력’이 ‘영적 영향력’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지겨울 정도로 숱하게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것들은 피비린내 나는 피라미드 체제에 길들여져 오직 남을 밟고 위로 올라가기 위한 사람, 혹은 자기 얼굴이 아닌 남의 얼굴에 땀을 흘려 자기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 즉 은밀한 샛길을 찾아 성공과 출세를 거머쥐어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이기적인 교훈일 뿐이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도 정확하게 상반된다. 이삭이 찾은 샘의 근원 내러티브가 던지는 메시지도 어쩌면 이삭이 아니라 그 시대의 분열과 다툼의 현실을 고발하고 갈등의 전환과 평화에 초점이 맞춰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축복이 개인의 번영과 동일한 의미로 여겨지는 세상에는 예수의 복음도 하나님 나라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만 아는 세상은 곧 죄의 세상과 직결된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반역하여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의 숙명은 죄, 즉 자기만 생각하는 사상이다. 자기의 유익에 합당하면 선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악이 되는 세상. 바로 그곳이 지옥이고,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근원이며, 하나님이 예수의 몸을 입고 직접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보이신 뒤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일 것이다.

목사가 신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모습은 언제나 반갑고 귀감이 된다. 나는 그런 목사를 존경한다. 이 책의 저자 박양규는 신학교와 신대원을 졸업하고 서양사학과와 중간사 분야를 더 공부했다. 신학교, 신대원, 전도사, 목사 안수, 부목사, 목사 청빙 혹은 개척으로 이어지는 소위 전통적인 노선에서 스스로 이탈한 목사 중 하나다. 이 책은 바로 그 용감한 이탈이 맺은 귀한 열매 중 하나인 셈이다. ‘전통적인 노선’에 속해 양적 (‘영적’이 아님을 주의하라) 부흥 시대와 사람을 잘 만나 대형교회 목사로 부상한 소수의 몇몇 목사들은 결코 해낼 수 없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텍스트로 주어진 유일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현재 우리 삶에 적용하는 다양한 방법 중 인문학을 선택하여 그 관점으로 성경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실행한다. 전통적인 성경 읽기 방법은 주로 말씀 뽑기나 큐티로 교훈을 뽑아내어 자기 삶에 억지로 적용하기 등 다분히 무속적인 방법에 천착해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겉으로는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으나, 안은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문화가 성행했던 근간에는 아마도 양적 부흥이나 번영 신학, 다시 말해 부와 성공이 하나님의 유일한 축복인 것처럼 암묵적으로 묵인되고 있는 영적 후진국의 문화가 있지 않았나 싶다.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도 다른 결과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는 모두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만 자기를 읽고 있었던 것이며, 하나님을 높인다고 하지만 자기를 높인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에 병처럼 퍼진 이런 악습이 생겨난 원인을 생각해볼 때, 성경을 풀어주고 가르치는 선생들의 중요한 역할과 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들이 스스로 취한 ‘영적 아버지’ 혹은 ‘구약의 제사장’이라는 권위 또한 교회당에 앉아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으로 작용했겠는가. 잘못된 방법과 잘못된 권위의 시너지는 종교적인 협박과 다름없고 이는 현재 한국 교회의 민낯을 만든 장본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하나의 돌파구를 알려주는 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 스스로도 한국 교회가 처한 슬픈 현실을 직시하고 있으며 그 원인 중 하나로써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잘못된 방법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과 직접 소통한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여러 선지자, 그리고 예수까지, 소위 성경 속 영웅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평범한 사람들, 즉 우리와 같은 ‘아무개’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의미심장한 인식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이 전환은 새롭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고대 근동이 아닌 21세기 팬데믹 시대의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하나의 모범답안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모든 독자들이 충분히 쉽게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이고, 인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문학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가 지향하는 인문학이란 고립되고 단절된 특권층의 문화가 아니라 인문학적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부당함에 대해 분노하는 것을 말한다고 명료하게 밝힌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적 성경 읽기’란 다음과 같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란 인문학적 소양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성경 읽기가 아니다. 한 사람에 대한 존엄성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며, 영웅들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현실을 살아가는 아무개들과의 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성경 속 ‘영웅’들이 아닌 ‘아무개’들은 사회적 약자들도 모두 포함한다. 이 시대의 키워드는 ‘공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공감 없는 종교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드러내야 할 정체성이다”라고. 또한 복음서에서 주로 초점을 맞추게 되는 예수의 기적을 묘사한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은 예수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의 ‘시선’이라고 말한다.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본문을 읽을 때에도 “예수님은 역시 대단하셔”라는 눈이 아니라, 고침 받기 전의 그들은 과연 어떤 고통으로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고 물으며 예수의 마음을 먼저 보는 눈을 가지라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예수께서 그들을 고치실 때, 고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자체가 중심이 아니었다. 먼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통을 공감하는 시선이 있었기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너무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예수의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읽어왔던 우리들의 모습 속에 숨은 그 무엇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앞서 지적한 것처럼, 타자는 대상화되거나 배제되고 자기 자신만 남아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와 성공을 거머쥐려는 응큼하고 사악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진 않았을까? 우리 모두 스스로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지점일 것이다. 

성경만 읽어서는 결코 성경을 깊이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손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를 하나님이 직접 쓰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을 입은 사람에 의해서 써진 책이다. 그리고 성경 기자는 우리와 똑같은 심성을 지닌, 즉 시대와 문화와 사상과 과학의 한계에 묶인 유한한 인간이다. 나는 인문학의 중요성도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과 상관없는, 구름 너머 어딘가에 있을 법한 하늘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인간의 이야기다. 즉,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그 창조세계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다. 

‘제사장 나라’의 부름을 받고 하나의 민족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일 뿐, 창세기 11장까지의 어둠이 끝나고 창세기 12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복음은 만민, 즉 모든 인간을 향한다. 이 부분에서 이 책이 강조하는, ‘영웅’에서 ‘아무개’로의 시선의 이동은 조용하지만 탁월한 개혁의 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양적 부흥을 꾀한 교회의 관점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의 전환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바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관점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소수의 몇몇 영웅들을 본받기 위해 애썼던 과거 우리들의 행위들로부터 돌아서서 그동안 가려졌던 아무개를 바라보고 공감하기를 시작하라는 메시지를 붙잡는다.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경종이 되리라 생각한다. 

#샘솟는기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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