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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일탈: 지금 나는 어디에.

파스칼 메르시어 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필연은 없다고, 모든 게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언젠간 운명 같은 만남을 갖기 마련이다. 지난주 목요일,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이 책은 그렇게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스릴 넘치는 현장감은 사전에 아무런 계획 없이 손에 붙잡히는 대로 책을 고르고 훑어보다가 마음에 꽂히는 문장이나 작가의 문체 등에 이끌려 즉흥적으로 구매할 때 최고조에 달한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작가, 평소에 즐겨 읽지 않는 현대문학. 이 두 가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난 일주일 남짓 나와 매일 동행하며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사건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믿기로 한다. 책을 다 읽고도 여전히 책을 도로 책장에 꽂아놓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여전히 무언가를 알고 싶은 것처럼, 이제 막 다시 읽기 시작할 것처럼 망설이는 모습이다.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기가 못내 아쉽다. 책 표지 그림을 가만히 쳐다본다. 내가 기차역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인생이라는 기찻길의 한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 같다. 어딘가로 떠나려는 것인지, 어딘가로부터 도착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나는 그저 떠나가는지 다가오는지 모를 기차를 바라보며 서 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리스본. 이 책을 읽고 이곳에 대한 이상한 동경이 생겨 버렸다. 세계지도를 꺼내 리스본의 위치를 찾아본다. 대륙의 끝,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의 서쪽,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해안에 위치해 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서쪽으로 태평양을 끼고 있지만, 리스본은 서쪽으로 대서양을 끼고 있다. 언젠가 보스턴에서 바라봤던 동쪽 대서양의 이국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그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은 어떤 느낌일까. 한국에서 바라본 태평양과 캘리포니아에서 바라보는 태평양의 차이만큼일까. 땅끝의 나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사막의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대서양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문득 나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 편도 1,250마일을 가려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야 한다. 작품 속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5주 간의 포르투갈 여행의 시작과 끝을 기차로 장식했다. 의미심장한 일탈의 시작과 끝이 되어 주었던,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 된 리스본행 야간열차. 그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안내한 마법의 기차.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거리 기차 여행의 낭만을 떠올려본다. 즉흥적인 이끌림에 몸을 맡긴 채 홀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상상해본다. 그 외국어들은 과연 노랫소리로 들릴까.

비 내리던 어느 날, 수십 년 간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릴 정도로 익숙했던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낯선 한 여자를 운명처럼 만난다. 그는 고전문헌학 교수다. 여느 때처럼 수업을 하기 위해 학교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다리 중간에서 난간 위로 팔을 뻗치며 미끄러지던 순간 그레고리우스는 그녀가 뛰어내릴 거라는 본능적인 생각을 했다. 놀란 심정으로 그는 들고 있던 우산을 순간적으로 내던졌고 덕분에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책은 이미 빗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사인펜을 꺼내어 그레고리우스 이마에 숫자를 몇 개 적었다. 전화번호를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데 마침 종이가 없기 때문이랬다.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걸어서 그가 강의하는 교실까지 들어와 잠시 앉아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조용히 빠져나가 떠나 버렸다. 그레고리우스는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 그녀에게 모국어가 무엇인지 물었었다. “포르투게스.” 그녀의 답변이었다.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지상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였다. 하루 종일이라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마에 전화번호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린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의 인생에 깊은 창을 찔러 넣은 셈이었다. 아니, 그녀가 아니라 포르투갈어의 그 묘하고도 신비한 노랫소리 같은 발음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낸 것이었다. 수업을 마치지도 않고 그는 책과 가방을 그대로 교탁 위에 두고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용기가 생겼다. 그레고리우스는 57년 간 안정적이었던 학자로서의 삶을 이제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불안과 해방감이 묘하게 섞인 기분을 느꼈다. 모든 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도 모두 새로운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찾은 에스파냐 책방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운명의 책을 만난다.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이었다. 제목은 ‘언어의 연금술사’. 마침 책방 주인은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알았다. 주인이 그를 위해 몇 문장을 읽어주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글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이 달라진 그날 오전을 위해 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책을 구입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책의 안 표지에 나온 저자의 사진을 보며, 이 포르투갈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고 움직이는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포르투갈에 꼭 가야 할 것 같은 운명을 느꼈다. 책방에 가서 포르투갈 어학 교재를 사고 공부를 했다. 책 일부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빠르게 진동했다. 교장 선생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메일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현금을 찾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고 모든 게 운명에 이끌리는 것 같았다. 일탈의 시작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레고리우스가 운명처럼 갖게 된 책의 저자 아마데우의 일생을 톺아보며 그 흔적을 좇는 여정이다. 아마데우는 이미 뇌출혈로 죽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마데우의 글은 그레고리우스가 가진 책 이외에도 이곳저곳에 많이 산재해있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일생을 좇는 여정은 그의 글을 좇는 여정이라 할 수 있고, 그 여정 가운데 등장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등장하는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며 텍스트 이면에 있는 콘텍스트까지 읽어나가면서 글을 깊고 풍성하게 이해해나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아마데우의 가족과 친구, 연인 등의, 이제는 모두 죽었거나 노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차례대로 만나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포르투갈이라는 낯선 땅으로 이끌었던 그 운명 같은 만남의 주인공 아마데우의 삶을 추적해 나간다.

아마데우는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아니, 언어 그 자체였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글쓰기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 속마음 등을 모두 털어놓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탁월한 지력을 가졌던 아마데우도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한계에 속한 유한한 인간이었다. 문학자가 아닌 아버지의 뜻에 맞추기 위해 의사가 된 아마데우는 어느 날 독재 정부의 하수인 격인 멩지스를 죽을 고비에서 살려준다. 독재에 대항하는 포르투갈 국민으로서가 아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던 한 의사로서의 숭고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아마데우의 인생을 크게 한 번 뒤트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멩지스로 인해 고통받는 포르투갈 국민들의 설움과 고통을 외면하고, 오히려 독재 정권을 옹호한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아마데우는 속죄라도 하듯 독재 정부에 저항하는 운동에 발을 담그게 되고, 인생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러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또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발생하며 아마데우의 삶은 점점 그를 내면으로 침잠케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침잠이 그의 글로 번역되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아무나 쓸 수 없는 글, 아마데우가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을 그는 그의 뜻밖의 인생의 심연에서 퍼올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의사가 아닌 문학가의 삶을 뜻하지 않게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왜 아마데우라는 사람에게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을까? 이방인에 불과한 아마데우라는 한 사람의 과거 흔적을 샅샅이 좇으며 그레고리우스는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단순한 운명의 이끌림으로만 설명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바람처럼 왔다 가는 전율의 순간은 지속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그런 자리로 내몰았을까? 모든 시간과 모든 돈과 모든 건강을 다 소진하면서까지 낯선 이의 삶의 흔적을 좇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의 공통점이 언어와 글쓰기에 기반한다는 점이 실마리가 될 수는 있을진 몰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남는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흔적을 좇아가는 과정에 일개 과학자에 불과한 나조차도 몰입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의문은 더욱 진하게 남는다. 그저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와 운명을 목격하고 그것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여정에서 나의 공감을 샀나 보다, 하며 나는 석연치 않은 결론을 내릴 뿐이다. 어쩌면 그것을 알기 위해 나는 여전히 이 책을 책장에 꽂아 놓지 못한 채 이렇게 답례라고 하듯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기차역에 서 있는 것 같다. 답을 모른 채로 덩그러니 그렇게.

#들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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