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읽고 쓰기: 풍성한 삶을 위하여.
하릴없이 멍하니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쓸모가 있지만, 본인의 직업 이외의 시간을 항상 멍하니 보내는 건 바람직하진 않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가 어쩌면 그 사람의 비공식적인 정체성, 그러니까 사회와 타자와 직업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진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더 잘 대변해주지 않을까 싶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가 솔직한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루에 많아야 두세 시간 정도 생기는 혼자만의 시간에 누군가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는 건 곧 자신의 자발적 의지이며 자신만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내가 사람을 사귈 때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 사람의 직업이나 나이 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어떤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선 꼭 그 사람 고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시간과 함께 스쳐 지나가고 만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책을 가까이하거나 글을 쓰거나 어떤 운동 (athletics 가 아님)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가까워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양한 직업과 나이와 학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곧 직업, 나이, 학벌 등은 친밀함에 전혀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한다.
예전엔 직업으로 유명해진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사귀고 싶어 했다. 이를테면, 나와 같은 생물학을 하는 사람 중 출세나 성공을 한 사람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들과는 좀처럼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같은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더 가까운 사이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땐 직업만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내 머리에 입력했고 그것만으로 그 사람과의 연결점을 찾으려 애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요컨대 직업이 그 사람 고유의 목소리를 대신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스쳐간 여러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던 셈이다.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나의 미숙함이다.
하루 24시간, 아무리 바쁜 사람도 먹고 자고 싼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일로 늘 쫓기는 사람도 극소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적어도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이 시간은 절대 저절로 나진 않는다. 만들고 확보해야 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바로 나의 관심이 있다. 이 부분을 놓치면, 나는 결코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킬링타임 한다고도 표현하는 그 시간, 한심스럽게 보냈다고 자책하기 쉬운 그 시간, 바로 그 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지 않을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면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면 주로 무언가를 읽거나 쓴다. 항상 그런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직업적인 일을 더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영화나 동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잠을 더 자기도 한다. 물론 멍 때릴 때도 많다.
기껏해야 하루에 한두 시간 혹은 두세 시간밖에 나지 않는 그때에 무언가를 읽거나 쓴다는 건 아무래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집중하기는 당연히 어렵다. 나에게 하루라는 시간이 통째로 그런 시간으로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랄 때도 많다. 말하자면 삶에서 격리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선 불가능하다. 아마 앞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백수가 되던지 전업작가가 되던지 하지 않는 한 내가 읽고 쓰는 시간은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을 지나기 전에는 그 짧은 시간에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에 찬 핑계로 그 시간을 허투루 날리곤 했다. 읽고 쓰는 건 일과 관계된 것 빼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그저 하릴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 살인면허를 얻은 시간의 007이 되어 무수히 많은 시간을 죽여왔다. 아주 가끔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렇게 시간을 때우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게으름과 수동성을 야금야금 조장할 뿐이었다. 만족감보다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나를 감쌌으며 그건 곧장 자책감과 허무함으로 나를 이끌곤 했다. 그런 걸 자각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달리 할 게 없어 그냥 계속 그렇게 (남들도 다 그렇지 않나, 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휴식이라는 그럴듯한 허울을 일삼아 나태의 구렁텅이로 나를 밀어 넣고 있었다.
무언가를 읽거나 쓰면서부터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내가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체가 되면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그 대상을 잘 모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대부분의 앎은 무의식이라 부르는 영역 안에 갇혀있는 것 같다. 그 세계는 수면 아래 빙산의 실체처럼 알려지지 않는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다. 죽을 때까지 매일 탐험해도 여전히 깃발 꽂지 못한 장소가 훨씬 더 많을 세계. 놀랍게도 그 세계는 우리 모두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세계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 세계를 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소유와 앎은 다르다. 어쩌면 평생 우리가 해야 할 공부는 그 세계를 조금씩 탐험하고 드러내면서 스스로를 알아가고 자신이 고유한 존재이지만 타자와 비교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존재, 그래서 모든 타자도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한다. 즉 자기 객관화와 겸손이다.
이러한 여정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완성이라는 단계는 없다. 모든 게 과정이다. 그래서 오만하게 누군가의 위에서 군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정에서 꽤 많은 비율로 변종이 생겨나곤 한다. 그 변종의 이름은 바로 꼰대다. 꼰대는 스스로 공부의 여정을 그만둔 사람들이다. 겉으론 누구보다도 겸손하게 보이고 누구보다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계속 정진하기보단 타자의 공부 여정에 관여하여 조언이나 도움이라는 핑계로 지적질이나 해대면서 정죄와 비난을 일삼고, 결국 자기 자신의 잘남을 은근히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정말 조심해야 할 부류가 아닐 수 없다. 불행한 사실은 우리 대부분이 이러한 트랙을 따르기 쉽다는 데에 있다. 저항의 끈을 놓는 순간 곧바로 꼰대의 트랙 위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거짓 겸손과 거짓 인자함, 거짓 진정성과 거짓말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는 위선자들. 꼰대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안타까운 건 꼰대는 스스로가 꼰대인 걸 잘 모른다. 혹 자신이 꼰대라고 대놓고 인정하는 부류도 있는데, 그건 연막이요 위장일 뿐이다. 거짓 겸손의 일환이다. 말이 아닌 행동, 글이 아닌 삶을 봐야 한다. 모든 사람을 향한 그 사람의 자세가 아닌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한 사람을 향한 그 사람의 자세를 봐야 한다. 꼰대는 현장에서 구분 가능하다.
무언가 읽고 쓰면서 달라진 점 또 한 가지는, 자연스레 늘어가는 책과 지식, 깨달음, 그리고 글이다. 써놓은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웬만해선 폐기하지 않는다. 종이에 쓰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 파일로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지울 필요는 없다. 한 폴더에 모아 두고 백업용으로 다른 곳에 카피해두면 된다. 알다시피 텍스트로만 이뤄진 워드 파일은 용량이 터무니없이 적다. 하드디스크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루에 한두 시간 (예전엔 짧다고만 여겨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바로 그 시간) 읽고 쓰는 훈련을 지속하다 보니 책 한 권도 쓰게 되었고, 지금은 두 번째 책을 쓰는 중이다. 중간중간에 궁극적으로 내가 쓰고 싶어 하는 장르, 즉 소설도 쓰고 있다 (얼마 전 세움북스에서 주최한 1회 신춘문예에서 턱걸이로 가작에 당선되기도 했다. 공모한 건 몇 년 전에 쓴 글을 수정한 형태였다). 또한, 나는 감상문을 적는 것으로 독서를 마무리하려고 노력한다. 읽은 책의 약 사 분의 삼은 감상문으로 남겨진다. 감상문을 남기지 않는 책은 내가 도통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작품들, 혹은 감상문을 쓸 가치를 못 느끼는 작품들이다. 그런 책을 왜 읽냐고 타박할지도 모르겠지만, 자극은 언제나 필요한 법이고, 새로움과 낯섦에 문을 열어두는 건 언제나 도움이 된다.
(소설가가 소설만 읽는다면, 나는 그 소설가를 그리 존경하지도 따르지도 않을 것 같다. 과학만 하는 과학자, 그래서 늘 과학 얘기만 늘어놓는 과학자를 내가 가까이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직업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는 사람은 적당한 선에서 관계 유지를 한다.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은 자기 직업에서의 성공을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은 유아적인 모습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치기 어린 이삼십 대가 아닌 이상 사오십 대가 되어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나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한 우물 파는 사람에 대한 환상은 나에게서 오래전에 깨졌다. 내세울 게 직업으로 이룬 큰 상이나 큰 업적밖에 없는 사람은 적어도 내게선 아무런 매력이 없다.)
왜 읽고 쓰냐는 질문에 나는 명쾌하게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건 아마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한다. 누군가는 그것 역시 자기만족이 아니냐고 비아냥댈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네가 과학자로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그딴 일에 열을 올리는 게 아니냐고 빈정댈 수도 있다.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는 단박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 나를 찾는 여행, 나를 알고 남을 알고 세상을 아는 여행. 아무래도 나는 매일 최소 8시간 투자하는 직업과 관계된 시간이 아닌, 하루에 한두 시간 확보하는 혼자만의 시간에 이런 여행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을 갖지 않고 한 우물만 파서 누구보다 깊은 곳에 도달하게 된다면, 아마 그 끝엔 ‘허망함’이라는 푯말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적어도 나는 그런 부류에 속하고 싶진 않다. 한 번뿐인 인생, 후반전에 들어선 인생, 이제 지향해야 할 것은 깊이보다는 풍성함이라 믿는다 (깊이를 지향하지 말자는 말은 아님).
'읽기와 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만드는 이유: 구매자 vs. 독자 (0) | 2021.09.01 |
---|---|
글을 잘 쓰고 싶은 이유? (0) | 2021.08.28 |
책 읽는 시간 (2) | 2021.05.24 |
간판과 거품 사이: 감상에 젖어들기 그리고 글쓰기 (0) | 2021.05.17 |
작가의 글: 고뇌와 미련의 텍스트 (0) | 2021.04.23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