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김영웅의책과일상

김소연 저, ‘마음사전’을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1. 8. 23. 15:52

정확한 단어, 정확한 문장, 깊고 풍성한 글

김소연 저, ‘마음사전’을 읽고

신형철은 글짓기는 집 짓기와 유사하다고 했다.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했다. 정확한 문장은 단 하나의 문장이 존재한다고 했다. 좋은 글, 잘 쓴 글은 곧 정확한 글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유일한 문장들을 찾아내어 모아놓은 정확한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휘력이 관건이다. 많고 다양한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한다. 문장력은 그다음이다. 문장력은 글쓴이가 가진 어휘력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적은 어휘로도 간결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 하지만 입체적인 의미를 담는 장문의 글을 써낼 수는 없다. 간결함이 단조로움으로 수렴된다면, 그렇게 써진 글 역시 단조로운 글에 머물 뿐이다. 

신형철이 말한 대로 글짓기가 집 짓기와 같다면, 높은 어휘력은 다양한 건축 자재의 소유와 같다. 성냥갑처럼 네모반듯하지만 아무런 특징 없이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집보다는 아무래도 꾸밀 곳은 꾸미되 과하지 않고, 고유한 매력을 발산하면서도 단정함과 균형을 잃지 않아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것처럼 보이는 집이 아름답다고 말해야 한다. 높은 어휘력과 간결한 문장력은 단조로움이 아닌 깊음과 풍성함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단어들의 미세한 차이를 분별하여 그 단어가 가지는 적확한 의미를 명료하고 유려하게 밝혀주는 참 고마운 도우미를 우연찮게 만났다. 만남의 축복일 것이다. 이 책 ‘마음사전’의 저자 김소연 시인은 두루뭉술하게만 알고 있던 비슷한 의미의 낱말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고유한 옷을 입히는 작업을 시행한다. 정확한 문장이 정확한 단어들의 집합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 책의 도움으로 독자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어휘력에 분별력을 가하여 보다 정확한 문장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딱딱한 느낌의 ‘사전’이라는 단어와 ‘마음’이라는 따뜻한 단어의 절묘한 조합이다. 수십 가지가 훌쩍 넘는 마음의 낱말들을 하나씩 방문하여 고유한 색을 찾아준 저자의 노력이 알알이 담겨있다.

읽어나가다가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이 하도 많아 밑줄 대신 수줍게 체크 표시를 여백에 해두었다. 그래서 어떤 문장인지 명확하게 지칭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나중에 다시 들여다볼 때 그 페이지 전체를 다시 읽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충분히 좋을 것 같다. 그런 수고는 기꺼이 하고 싶다. 

몇 군데 특별히 마음에 와닿은 부분들을 발췌해본다. 이 책이 이런 내용이라는 것을 내가 허접하게 손을 대어 설명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다. 딱 열 문장이다.

1.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돈은 전혀 소중하지 않은 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다. 너무 중요한 나머지 소중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57p

2.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르지만, 나의 평안함은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있다. 62p

3. 처참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처절함은 차마 손댈 수 없는 정황이며, 처연함은 눈 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상태다. 63p

4. 동정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나 자신은 그것을 이미 갖고 있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느낀다면, 연민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나 자신도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결핍감을 느낀다. 요컨대 동정은 이질감을 은연중에 과시한다면, 연민은 동질감을 사무치게 형상화한다. 66p

5. ‘외롭다’라는 말에 비하면, ‘쓸쓸함’은 마음의 안쪽보다는 마음 밖의 정경에 더 치우쳐 있다. 외로움은 주변을 응시한다면, 쓸쓸함은 주변을 둘러본다. 마음을 둘러싼 정경을 둘러보고는, 그 낮은 온도에 영향을 받아서 마음의 온도가 내려가는 게 바로 ‘쓸쓸함’이다. 92p

6. 허전함이 무언가를 잡았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손이라면,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보았던 손이다. 98p

7.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182p

8. 솔직함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정직함은 남을 배려하려는 것이다. 200p

9. 질투는 자기가 못 가진 것을 향해서만 생기는 감정이지만, 시기는 자기가 갖고 있으면서도 생기는 탐욕이다. 202p

10. 착함은 현상이고 선함은 본질이다. 착한 사람은 불의를 보고 화낼 줄 모르지만 선한 사람은 불의를 보면 분노한다. 착함은 일상 속에서 구현되고, 선함은 인생 속에서 구현된다. 204p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모르던 단어는 없었지만 알고 있던 한 개의 단어가 여러 개로 불어난 기분이다.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저자가 궁금했다. 시인일까 싶어 저자의 이력을 찾아보니 역시 시인이다. 시인이 쓴 산문. 치명적인 매력이다. 나로선 언제나 반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마음의 낱말뿐만이 아닌 인생의 낱말들도 두루 살피고 있는데 유독 육아에 관련된 이야기가 빠져있다. 인생의 시간을 다루는 장에서도 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만 나와 있다. 사랑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연애와 이별에 관련된 낱말들로 가득 차 있다. '함께'를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책 전체의 행간에선 '혼자'인 저자가 읽혔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남는 여운도 조금 쓸쓸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새롭게 보이는 인생의 수많은 것들이 있는데, 가능하다면 그것들이 추가되면 좋겠다 싶다. 2008년에 첫 출간되었으니 13년이 지난 2021년 현재 개정판이 나오게 된다면 꼭 그 부분이 추가되어 좀 더 풍성하고 좀 더 따뜻한 느낌의 책이 되면 좋겠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좋지만 말이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