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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의식과 통제를 넘어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9. 27. 09:54

의식과 통제를 넘어

사람의 진짜 매력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비롯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나는 이를 그 사람의 여백이라 부른다.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에서의 모습. 준비된 말이나 자세, 눈빛, 옷차림 등 의식을 거친 부분들이 미처 메우지 못한 빈 공간. 통제되지 못한 작은 움직임들. 나는 여백이 매력적인 사람이 좋다. 

습관처럼 남자들이 여자들을 놀리거나 깜짝 놀라게 하는 등 짓궂은 장난을 치는 이유도 어쩌면 그 장난이 야기할 통제되지 않은 여자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 반응으로부터 남자는 여자의 숨은 매력에 더 빠져드는 게 아닐까. 통제선 안쪽으로 자꾸만 침투하려는 움직임이 성공을 거두어야 비로소 여자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은연중 믿어서가 아닐까.

반면, 이러한 여백까지도 통제하여 마치 통제되지 않은 모습처럼 가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인간답지 못하달까, 기계 같다고나 할까, 하는 섬뜩한 기분에 완전 속았다는 기분까지. 속을 알 수 없다는 말도 아마 이런 맥락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이게 하기’ 만큼 부자연스러운 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논리는 기억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억에 남아 있는 오래된 과거의 어떤 큰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엉뚱하게도 하찮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이 먼저 생각이 나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그것이 그 기억의 방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때도 많아 자주 난감해진다. 이를테면, 친구 결혼식에 참석한 기억을 떠올린다고 하자. 친구의 예복이나 신부의 얼굴, 결혼식장의 화려함, 피로연의 분위기와 음식의 맛 등이 생각나기보다는, 결혼식장 가는 길에 무심코 쳐다본 바깥 풍경이라든가, 결혼식장에 들어서서 부조금을 낼 때 우연찮게 본 낯선 사람의 얼굴이라든가, 피로연을 기다리는 도중 어디선가 들려온 음악소리라든가, 음식 냄새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 결혼식 기억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기억하게 되는, 이 기묘한 현상. 심리학을 조금 공부한 사람은 이런 현상을 두고 내 마음 저변을 읽어내려고 애써볼지도 모른다. 실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싫었던 게 아니냐, 그날 언짢은 기분이었던 건 아니냐, 혹은 결혼식에서 좋지 않은 일이 생겨 그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장기기억 저장 과정에서 핵심적인 내용이 삭제된 것일 수도 있다, 등등. 물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런 현상이 기억의 자연스러운 기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의식한 것들은 잊히기 쉽지만, 의식하지 못한 것들은 잊힐 기회조차 얻지 못할 때가 많아 시간이 지나도 오랜 잔상으로 남게 된다는, 또 하나의 지론을 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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