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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공감의 통로가 되는 인간의 모순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10. 5. 23:33

공감의 통로가 되는 인간의 모순

티시 해리슨은 ‘오늘이라는 예배’ 6장에서 스스로를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는 평화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묘한 위로를 느꼈다. 그건 아마도 나 역시 스스로를 ‘아내에게 큰소리치면서도 말과 글만 앞서가고 번지르르한 몽상가’에 불과하다고 여길 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순 덩어리의 인간이다.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이유도 가만히 따지고 보면,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그의 글 속에서 은밀한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의 관점은 하나의 방향성만을 가진다. 거기엔 다양성도 풍성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존재하는 건 편향적인 획일성이다. 그 방향과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모두 틀린 게 된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방향이 기득권 층에게 유리하게 굽어 있다는 점은 당위성이라고 하는 잣대의 신뢰도에 금이 가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나는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지 의문을 가지기도 전부터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획일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배웠던 것 같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나는 이래야만 한다고 배웠던 셈이다. 이유는 빈약했고, 어렸던 나는 권위에 눌려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철수와 영희가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배웠던 나의 지난날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공통된 아픈 과거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고 머리가 크면서 나는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거기에 대한 부분적인 답을 지금도 여전히 하나씩 얻어가고 있다. 처음에 그것들은 모두 금기와 같았다. 이율배반적이라느니, 모순적이라느니 하는 속성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또 아니어야만 했다. 그러나 교과서가 아닌 책에서 배운 지식과 삶에서 배운 지혜는 한결같이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인간이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모순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금기는 우물 안과 밖의 경계에 불과했고, 틀린 것은 다른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당위성의 잣대에서 벗어나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정보에 접근하게 된 것이었다. 이 바뀌어버린 순서 때문에 불필요한 죄책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한편으론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분노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나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율배반적인 사람이고 모순적인 사람입니다. 그 모습이 바람직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주의의 오류에 빠지지도 않겠습니다. 인생 다 살아본 사람처럼 허무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히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언제나 소망을 잃지 않고 공평과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나아가, 공감이 거세된 당위성의 폭력에 끝까지 저항하겠습니다. 순수와 정통이라는 탈을 쓴 고집과 아집, 옹졸과 편협의 실체를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공감하지 않고 순수하고 (?) 거룩하기만 한 (?) 우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모순되고 때론 이해하기 힘들어도 여기 우물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공감하며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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