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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에게 이런 일이!?"
아마도 살면서 인간이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리고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더 진지하게 더 많이 하진 않을까.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교회 다니면서도 여전히 종교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다른 복음", 즉 본의 아니게 "복음" 아닌 "종교" 전달자가 되어버린 사람들로 그 비중을 국한시킬 수 있지 않을까.
고난과 훈련의 유익함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는 아마 '욥기'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과 사단과의 대화 가운데 왜 욥이 고난받게 되는지를, 욥기의 시작부터 우리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작 불가항력적인 고난을 실제로 받았던 욥은 그 고난이 끝난 이후에도 그 이유를 몰랐다. 다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욥은,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 가운데서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 자신의 영적 교만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다. 그리고 욥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께선 욥의 고난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다.
고난을 겪고 나서, 그 고난이 왜 자신에게 임했는지 정확히 알게 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니, 정말 그 직접적인 이유를 알 수 있긴 한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지나고 나서야 그 고난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비로소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원망섞인 Why의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이번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된 무언가 (What)에 대한 답으로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곤 한다. 물론 리뷰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문제점을 직시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믿게 되는데, 사실 이 믿음은 자신의 반성에서 나온 주관적인 해석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즉, 대부분의 고난의 사례들에서 인간은 그 원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과 문명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지만, 인간의 영적인 부분만은 그러지 못했다. 이것은 곧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체계로는 결코 영적인 부분을 터치할 수 없다는 걸 말해준다. 고난은 이 영적인 부분과 맞닿아 있다.
인간에게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그릇됨을 비추고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아성찰은 개개인에게 각인된 다양한 관점에 의해 너무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결론밖에 도출해 내지 못한다. 이를 위한 암묵적인 합의를 위해 학교에서는 윤리 도덕을 가르치지만, 이 또한 각 문화에 따라 너무나도 다양해 이렇다할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성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 반성의 기준을 상실한 우리 인간들의 비극인 것이다. 여기서 종교가 나온게 된다.
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그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행위이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로잡아 보겠다는 인간 의지의 표출이다. 종교는 보통 고행과 이어져있다. 이는 인간의 욕구가 이기적이며 화를 불러 일으킨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인데, 그러한 욕구를 스스로 차단함으로써 그 화를 막아보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식욕, 성욕 뿐 아니라 심지어는 사람들과의 일반적인 교제도 "악"으로 간주하고 그 악을 애써 피하려고 전 인생을 받친다. 어느 정도 자신을 조절함에 성공한 사람들은 일종의 쾌감을 느끼게 되는데, 재미있게도 그 쾌감은 그 무언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보려는 초기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고행의 스케줄을 단지 성공적으로 마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열반에 이르렀다든지 뭔가 성인이 된 것처럼 자타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인정은 여전히 답을 갖고 있지 못한채 일종의 과정을, 그것도 스스로가 옳은 과정일 거라고 가정하고 정한, 자신의 계획대로 잘 실행했기 때문에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해내기 어려운 과정이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인정을 받을 순 있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의아함은, "So What?"
자아성찰과 종교적인 접근은 고난의 원인을 스스로의 그릇된 행동에서 찾는다. 과거의 실수나 오판과 오해로 인해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인간은 완전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되는 논리 전개일 수 있다. 만약 인간이 불완전해서 실수를 할 수 밖에 없고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오해를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또한 이미 저질러진 것들의 근본을 인간 스스로 바로 잡을 수 없을만큼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다면, 아마도 자아성찰과 종교적인 접근은 헛다리 짚는 격이 될 것이다. 물론 실수나 오판과 오해를 하고 나서도 당당하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그럴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성찰의 절대적인 기준, 모든 판단의 근원을 난 성경에서 찾는다. 인간이 다른 동식물과는 달리 육 뿐만 아니라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야만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하나님과는 달리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아가, 창세기 3장에서 기록된 인간이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원죄 사건을 인간 타락의 시작이라는 사실도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전제가 된다면,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고, 절대적인 반성의 기준을 창조주인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을 수 밖에 없으며, 고난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하는 Why의 질문 대신 이번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은 무엇 (What)을 깨닫길 원하시는지를 질문하게 될 것이라 본다. 인간사엔 수많은 그럴듯한 질문들과 그럴싸한 대답들이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진화하겠지만, 그 찾고자 하는 답은 인간의 능력 너머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바로 복음이다. 종교가 아닌 복음. 인간이 하나님께로 다가가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종교가 아닌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복음 말이다. 복음의 영향력으로 세상을 살려야 할 교회 내부에서조차 종교가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린 살고 있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언제나 "남은 자"는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 소수의 "남은 자"에 의해서 순수한 복음은 지속적으로 시대를 타고 전달될 것이며, 언젠가는 고난도 끝이 날 세계복음화의 그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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