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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두 권의 신학 책을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6. 6. 18:18

두 권의 신학 책을 읽고

최근 신학 책을 두 권 읽었다. 문학 책과 달리 신학 책에 대한 감상문 쓰기는 점점 주저하게 된다. 한창 수십 권의 신학 책을 읽으며 신학적인 궁금증을 해소시켜나갈 땐 읽는 책마다 새로운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런 지적인 호기심도 어느 정도 채워지고, 신학이나 과학 혹은 철학이나 인문학의 한계를 가늠하게 되면서 그 열정도 많이 식어버렸다. 지금도 열 권 중 한두 권은 신학 책을 꾸준히 읽어나가지만, 그것은 순수한 신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마치 성경을 서너 장씩 매일 꾸준히 읽어나가는 것처럼, 나름대로 영성 훈련의 일환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만 읽어나가는 방법보다는 신학 책을 병행하는 편이, 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효과적이고 풍성하고 깊은 영성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이것이 너희 신이다’ (부제: 우상숭배 시대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길)를 읽으며 나는 유일신론의 변천과정이 다신론에서 시작하여 단일신론을 거쳤다는 가설에서 흥미를 느꼈다. 특히, “다른 신들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닌가?”라는 질문과 “야훼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처럼 신적 정체성과 지위와 권능과 영원성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숭배하는 자들과 관련해서는 그 무엇이다. 그것들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을 경배하고 그들에게 복종한, 또는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어떤 목적이든 이루기 위해 그들의 도움을 요청한, 사람과 문화들로 이루어진 세상 안에 있는 그 무엇이다”라는 답이 내 이목을 끌었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또한 우상숭배, 즉 사람들이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섬길 때 모든 것이 뒤집히고, 모든 근본적 관계들이 무질서해진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동의가 되어졌다. 구약의 우상들이나 그 우상이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신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므로 그 신들을 경배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행위인 것이다. 신들이 인간의 작품이라면 파괴될 수도 있고, 그 신들 역시 부패하고 소멸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린 언제든 우상을 타파할 수 있다. 단, 그것들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대표작 ‘하나님의 선교’의 연장선 상에서, ‘우리의 선교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우상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계속 일하는 것, 사람들을 그 우상들이 조장하는 파괴적 망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에서 나는 다시 하나님 백성의 사명을 상기할 수 있었다. 우상들은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 우리가 신뢰하는 것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모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여호와만 섬기는 행위는 가히 혁명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도 마음에 와닿았다. 나의 삶의 맥락에 적용해 볼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직접 만들고 섬기고 있는 우상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에 대해서 묵상도 해보았다.

이경희 저, ‘욕망과 영성’ (부제: 르네 지라르, 성경, 기독교 영성)을 읽고 나는 월터 윙크의 대표작인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줄여서 사체예비)’을 다시 꺼내어 들춰보게 되었다. 종교와 폭력의 상호연관성에 대하여 월터 윙크 역시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Scapegoat) 이론’과 ‘모방 욕망 (Mimetic desire) 이론’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연신 밑줄을 그어가며,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며 꼼꼼히,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꽤 오랜 기간 동안 집중해서 읽어냈고, 그 이후 나의 신학/철학적인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던 사체예비는 다시 펼쳐봐도 탁월한 통찰의 책이 아닐 수 없다.

사체예비에 비해 ’욕망과 영성‘은 아주 쉽게 써진 대중적인 책이다. 손에 딱 잡히는 판형과 짧은 분량과 저자의 쉬운 글쓰기 덕택에 두 시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다. 요컨대 이 책은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이론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궁극적으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 및 예수님이 걸으신 제3의 자발적이고 비폭력적인 길의 의미를 되짚어준다. 안셀름의 만족설의 한계를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이론이 극복할 수 있다는 점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희생양 (속죄양)의 의미를 넘어 순전한 희생자로서, 동시에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다 아시면서도 자발적 희생자 (Intelligent Victim)로서의 예수님의 비폭력적이고 모든 모방 폭력을 끊어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도 상기시켜준다. 성경의 여러 내러티브를 르네 지라르 이론으로 다시 읽으며 해석하고 묵상해보는 경험은 분명 우리의 신앙을 더욱 풍성하고 깊게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나는 성경 읽기와 더불어 신학 책 읽기를 꾸준히 병행할 생각이다. 성경만 읽는다거나, 신학 책만 읽는다거나 하는 치우친 읽기는 지양할 것이다.

#IVP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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