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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읽고
이 책의 부제는 ‘성경 속 7인을 통해 듣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성경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상상력을 통해 눈물과 탄식 가운데 있었던 7명의 성경 인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내러티브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셨던 말씀을, 성경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가운데 쓰인 예레미야애가를 우리에게 주셨던 이유의 연장선에서, 들어보자고 요청한다. 코로나로 흉흉했던 시대를 함께 지내온 크리스토퍼 라이트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으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이 글은 저자가 선택한 7명의 인물과 그에 따른 소주제에 따른 나의 짧은 감상들로 대신한다.
1. 아브라함, 시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걷기 (창세기 22:1-19)
복음의 시작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도전을 주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중에서도 진미는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이 등장하는 장면일 것이다. 수많은 철학자,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문학작가에게 영감을 주고 수많은 해석을 낳았던 이 본문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항상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방식은 물론 이삭의 입장에서 같은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상상하는 방식까지 내가 이 본문을 읽고 묵상하고 여러 해석들을 접할 때마다 이르는 결론은 동일하다. 즉, 믿음과 순종이다. 이는 히브리서 저자나 야고보서 저자가 이른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 이 책의 저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 곧 실천하는 순종이 없는 믿음은 약하거나 미숙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것일 뿐입니다. 전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순종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동일한 이유로 바울은 아주 단호했습니다. 그의 선교 목적은 단지 청중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이야기의 절정이 단지 이삭 대신 어린 양이 죽었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보인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리라는 약속을 실제로 지키시리라는 것이라며 우리도 거기까지 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믿음과 순종에 따른 축복은 그렇게 실행에 옮긴 자에 국한되지 않고 만민을 향한다는 것. 크리스토퍼 라이트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언제나 울림을 주고 나를 다잡게 만든다.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시금 나의 영적인 방향을 재조정하게 만든다.
2. 나오미와 룻, 비번영의 복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룻기 1장)
룻기의 복음을 ‘비번영의 복음’이라고 해석하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시선이 신선하면서도 전적으로 수긍이 간다. 번영 복음은 믿음과 순종이 건강과 부와 성공 같은 가시적인 복을 가져오는 보증수표일 뿐 아니라 질병과 가난과 실패 같은 가시적인 화를 피해 가는 부적인 것처럼 말한다. 이에 반해 룻기의 복음은 믿는데도 불구하고 고난 받는 이야기, 고난 받는데도 불구하고 믿는 이야기라고 저자는 통찰해 낸다. 번영 복음과 정반대의 복음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플롯의 성경 속 내러티브를 여럿 알고 있으며 그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은 물론 순종하는 삶으로 반응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내 삶도 비번영의 복음이 증거하는 하나의 예제라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복음을 통할 때에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살아내며 소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룻과 같은 이방인에게 전적인 헌신과 믿음의 순종을 허락하시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번영 복음의 화려한 가면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3. 엘리야, 우울증과 두려움의 치유 (열왕기상 19장)
갈멜산 대결에서 완승을 거둔 엘리야에게 곧바로 찾아온 건 죽고 싶을 만큼의 절망과 두려움이었다. 이세벨 왕후가 자기 목숨을 노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 빠진 엘리야의 병을 진단한다. 이른바 우울증이다.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셔서 더 큰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위로자이시다. 죽여달라는 엘리야에게 잠과 떡과 물을 주시고 달래시는 장면이나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세미한 가운데 말씀으로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게 하시는 장면은 읽을 때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종종 엘리야에게 나를 대입하기도 하고 엘리야가 받았던 위로와 회복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번에 읽을 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과 엘리사를 남겨 두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엘리야의 심정이, 그 울컥하며 자기 객관화를 이루고 다시금 하나님의 사명을 다잡는 그 뜨거운 마음이 좀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신뢰한다.
4. 코헬렛, 어처구니없는 세상과 하나님의 주권 (전도서 9-12장)
코헬렛은 우리가 전도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다. 코헬렛은 이스라엘의 지혜문학 전통에 서 있다. 전도서는 코헬렛의 조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조언은 주로 지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과 영적 영역을 아우르는 지혜의 근본적 이중성, 즉 지혜로운지 어리석은지, 의로운지 악한지, 경건한지 불경건한지에 대한 대립을 펼쳐 놓고 선택을 촉구하는 식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마치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 가지 영역은 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해석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을 아우르는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나 역시 아멘으로 화답한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우리 삶이 지혜롭고 의로우며 경건할 수 있고, 어리석고 악하며 불경건한 길을 피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인간의 한계 때문에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존재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을 나는 비록 머리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아멘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저자의 요구대로, 그리고 코헬렛의 요구대로, 우리 삶이 비록 어처구니없을 만큼 악과 혼란이 넘쳐 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도래할지라도, 우리의 창조자요 궁극적 심판자요 우리의 유일한 소망되신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둔 채 기뻐하고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5. 예레미야, 환멸과 원망과 자기연민의 치유 (예레미야 15:10, 15-21)
태어나면서부터 예정된 다툼과 싸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모두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상황. 예레미야는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여기서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성경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모든 말이 그 자체로 직접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부정적이고 환멸에 찬 예레미야의 생각과 말이 정직하게 기록된 것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꾸짖으시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말한다. 환멸과 원망 (적대감)과 자기연민이라는 파괴의 삼단콤보에 신음하던 예레미야가 토해내던 말들보다 그렇게 토해내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가는 과정 자체가 메시지라는 것. 예레미야를 통한 일보다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기회를 제공한다.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객관적 상황 앞에서,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런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시간표를 신뢰하고 기다리며 지금, 여기에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것. 그 과정 중에 우리 안에 있던 불신앙과 반역의 욕망이 발견되고 치유되는 것. 이런 과정을 신앙생활이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의 눈엔 목적이라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은 여기에서도 진실이다.
6. 바룩, 야망이 좌절되는 아픔 (예레미야 45장)
바룩이라는 낯선 이름을 만난다. 꽤 높은 관료직임에도 불구하고 보장된 자리을 택하지 않고 왕 대신 왕과 성전과 왕궁으로부터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던 예레미야를 택하고 섬겼으며, 예레미야를 도와 두루마리를 작성해 하나님의 말씀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성전에 가서 그 두루마리를 낭독했다고 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건 평안한 가운데 쓰고 낭독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대재앙 중에 죽을 수도 있는 입장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레미야를 섬기고 그의 곁을 지켰다. 비록 성경에는 많은 독자들에게 낯선 이름으로 다가올 정도로 아주 미미한 존재로 그려지지만 바룩이 없었다면 예레미야의 활동은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여기서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바룩이 되어도 괜찮겠느냐?”라고 말이다. 바룩은 시련이 다가와도 묵묵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충직한 많은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듯하다. 바울에게는 아나니아가 있었다. 아니니아가 없었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는 일은 적시에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뭇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역할과 그렇지 않고 그 주인공의 그림자에 묻혀 이름도 빛도 없이 일하고 사라지는 역할. 나는 여전히 전자를 후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진 않을까. 하나님의 눈보다 사람의 눈을 더 많이 의식한 채 하나님 앞에서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진 않을까. 나는 과연 시편 84:10의 고백처럼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 하나님, 제 안의 허영을 거세시켜 주소서.
7. 베드로, 실패와 죄책감의 치유 (마태복음 26:69-75)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장면과 더불어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수 앞에서 맹세까지 할 정도로 큰소리치던 베드로는 실패했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 베드로의 부인 장면이 성경에 실린 이유, 특히 사복음서에 공히 실린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실패자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패는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의 수제자라고 해도 말이다. 또한 그 실패는 예견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실패를 정확하게 예견하셨다. 저자의 해석대로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의 예견대로 예수를 부인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참 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실패가 사실이고 예견될 뿐 아니라 용서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아시고 놀라지도 않으시고 실망하시도 않으시며 그것을 통해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길 기다리신다. 우리들의 자발적인 회개에 언제나 용서하시면서 말이다.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과정에 불과하고 그 아픈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나약한 본모습을 사실대로 직시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믿음은 더 성숙해지고, 우리 안의 불신앙은 치유되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더욱 커져만 가는 것이다. 실패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베드로는 실패자가 아니라 용서받고 치유함을 입은 자가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서유니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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