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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함과 나약함 사이에서

엔도 슈사쿠 저, ‘바다와 독약’을 읽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던 1945년 5월, 일본을 공습하던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의 초대형 폭격기 B-29 한 대가 오이타현과 구마모토현 경계 근처에 추락하여 탑승원 12명이 모두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중 8명은 서부 사령부로부터 재판도 없이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데, 때마침 생체실험용으로 제공해 달라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의 제안이 승인되는 바람에 이들은 모두 끔찍한 실험동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만행은 실화다.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해 5월 17일부터 6월 2일에 걸쳐 실제로 벌어진 이 처참한 인권유린 사건을 역사는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이라고 기록한다.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은 이 작품 ‘바다와 독약’의 중심 소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의미 있다고 판단되는 이유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1923년생인 엔도 슈사쿠가 자국의 수치이자 자국 역사의 오점 중 하나일 이 사건을 사건 발생 후 12년이 지난 1957년에 한 잡지에 연재하고 그다음 해에 단행본 소설로 출간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이 1966년에 출간되고, 폐렴으로 사망하기 3년 전인 1993년에 그의 마지막 작품 ‘깊은 강’이 출간되었으니, ‘바다와 독약’은 그의 초기작이라 할 만하다. 그가 첫 소설을 발표한 지 4년 만의, 그러니까 그가 35세가 되던 해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엔도 슈사쿠의 평생 숙제였던 신의 존재와 부재에 따른 인간의 죄악과 나약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비록 ‘침묵’와 ‘깊은 강’에서처럼 기독교 색채를 정면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으로써 현재 시점의 화자의 눈을 통해 바라본 ‘스구로’라는 한 의사를 매개로 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시공간은 생체실험이 자행되던 1948년 규슈대학 의학부에 맞춰진다. 비록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이 작품에 대한 바른 독법은 사건 위주가 아닌 인물 위주여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사건이 얼마나 끔찍한 만행이었는지를 밝히거나 재조명하는 데엔 그리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미 그걸 사실이라고 전제한 상태에서 그 실험에 가담한 인물들의 내면을 조명하는 것이 이 작품의 중심 의도일 것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 한다. 스구로 의사 (사건 당시 의대생) 뿐만이 아니라 여러 등장인물들 (간호사 우에다, 스구로의 동료 의사 토다, 집도의, 조교, 장교들 등)이 이 실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기로 선택하는 순간들, 실험이 자행되는 상황 가운데 이들의 심리 상태, 양심에 거리낄 뿐 아니라 인권을 유린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진행되는 실험에 참여하는 장면들, 그리고 실험이 끝나고 미군 포로가 처참하게 살인을 당한 채 고깃덩어리가 되어 (장교들은 포로의 생간을 꺼내어 안주로 먹기도 했다는… 아, 이건 좀…) 쓰레기처럼 치워진 이후 스스로 내면의 괴리감을 처리해 나가는 장면들.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유대인이었고, 그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는 피해자 입장에서 바라본 인권유린 현장에 대한 하나의 보고서였다. 이에 반해 ‘바다와 독약’은 가해자 국가의 국민 엔도 슈사쿠가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전쟁 중 황폐한 인간의 참혹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보여주고, 그 인간들의 심리가 시공간이 다른 곳에서 이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심리일 수도 있다는 점을 넌지시 짚어주기에는 더 적절할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연민이 아닌 반성과 참회의 뉘앙스가 묻어 있는 바탕이 인간이 인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줄 수 있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을 잃고 길을 잃은 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의 모습이라는 해석은 이 작품을 넘어 저자 엔도 슈사쿠를 읽는 바른 독법이리라 생각한다. 이 독법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때,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 길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그대로 머무는 스구로의 모습은 ‘침묵’에서의 기치지로 냄새를 풍긴다. 나약한 인간, 인간의 나약함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참혹한 현장 가운데 신은 어디에 존재했는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셨는가, 등의, 하고 또 하고 심지어는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넘어서도 또 하게 되는 질문을 말이다. 아, ‘침묵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무겁고도 잘 잡히지 않는 신비를 다시 한번 묵상할 때다.

 

*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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