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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인식의 다리

파스칼 메르시어 저, '언어의 무게'를 읽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김춘수의 '꽃'에서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그는 그저 하나의 몸짓일 뿐 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일까? 타자에 의해 이름이 불리는 존재만이 비로소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된다는 말일까? 나는 이 시에서 '이름'을 '언어'로 바꿔본다. 그러면 언어는 자연스레 무게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잇는 다리의 무게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겠지만, 작품 속 주인공 레이랜드의 시간도 여러 번 재부팅된다. 그럴 때마다 언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인생의 여러 막을 닫고 다시 여는 무대 커튼 같은 것이었다. 커튼이 닫히고 다시 열리는 순간이 그에게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재인식하는 순간이었던 걸까. 일상에 흩어진 소중한 것들이 하나씩 빛을 잃어가는 동안 우리는 점점 무뎌져간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 구원을 맞이하고, 우린 그제야 빛바랜 사진을 눈물을 머금고 다시 바라보듯 잃었던 의미를 재발견하며,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곤 하는 것이다. 언어는 잃었던 의미를 일깨워주고 재해석하게 해 주며 인생의 새 막을 여는 구원의 열쇠이기도 하다.  

레이랜드는 과거에 옥스포드를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러나 그에게 옥스포드는 몸에 안 맞는 옷이었다. 여러 언어를 알던 동양학자였던 삼촌 집을 찾은 어느 날, 거실에 붙어있는 지중해 연안의 지도를 보며 레이랜드는 남다른 꿈을 갖게 된다. 지중해에 접한 모든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것. 언어에 재능과 애착이 있던 그는 도망 나오듯 대학을 그만두고 주먹구구식으로 여러 언어를 배우고 익히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무모한 일처럼 보였다. 이 작품의 저자 파스칼 메르시어의 전작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떠오를 만큼 말이다. 그 역시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한 여자를 만나 포르투갈어를 들은 뒤 모든 걸 내려놓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노년의 그레고리우스가 행했던 무모한 일보다는 아무래도 젊은 레이랜드의 무모한 일이 그의 인생을 더 크게 변화시켰을 것이다. 

부모가 원하는 삶이나 남들의 시선에 맞춘 삶이 아닌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던 레이랜드는 낡은 호텔의 종업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고, 쪽방에서 생활하면서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를 틈타 번역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그 연장선의 삶에서 운명처럼 리비아를 만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 당시 기자였던 리비아는 출판사 사장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면서 그녀가 출판사를 물려받게 된다. 영국에서 만난 그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갑작스레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로 이사하게 된 이유였다. 트리에스테는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도시였다.

꾸준히 번역가의 길을 걷던 레이랜드는 트리에스테에서 아내를 심장마비로 잃고 큰 충격에 휩싸인다. 다시 안 맞는 옷을 입듯 출판사를 인계받아 이끈다. 번역 일도 계속하면서 말이다. 이때부터 레이랜드는 죽은 아내에게 남몰래 꾸준히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리비아가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리비아는 레이랜드의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그런 존재가 사라졌으니 레이랜드가 느끼는 하루하루는 그저 반복되고 견뎌내야 하는 빛바랜 일상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랜드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청천벽력이었다. 발작을 경험했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뇌 스캔 사진에는 눈부실 만큼 하얀 꽃이 피어있었다. 뇌종양이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하루하루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레이랜드는 출판사를 매각한다. 큰 결단이었다. 매각한 이후에도 그는 그곳을 떠올리면 사장 자리에 자신이 아닌 리비아가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에게 출판사는 죽은 아내의 분신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이어서 그는 아내와 함께 살던, 그리고 아내가 죽었던, 그리고 성인이 된 딸과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 위치한 집을 떠나 홀로 삼촌이 유산으로 남겨준 영국 런던 집으로 향한다. 같은 일상을 그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에겐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이 소설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이후에 소개된다. 그것은 레이랜드의 뇌종양 판정과 출판사 매각 후 삼촌 집으로 향하는 장면 사이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당황스럽기도 한 그 사건은 바로 레이랜드의 뇌종양 판정과 시한부 선고가 오진에 의한 판단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요컨대 사진이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진 아래에 깨알만큼 작은 글씨로 적힌 다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새도 없이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충격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던 것이다. 

아, 오진이라니! 레이랜드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죽었다 살아난 심정이었을까? 감사로 충만한 마음이었을까? 혹시 분노에 사로잡히진 않았을까? 특히 그에게 남다른 의미였던 출판사를 매각까지 한 이후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레이랜드는 나중에 여러 번 출판사를 손님으로 방문한다. 초반에는 돌이키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했다. 단 열흘만 일찍 알았다면 출판사 매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랜드는 무너지지 않고 진화하고 성숙한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삶이 그 사건 때문에 그의 앞에 열렸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레이랜드의 성장기 혹은 성숙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 모진 운명의 장난 같은 사건도 언어와 함께였다. 그는 발작을 겪을 때마다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읽을 수는 있는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지 두려워했다. 병이나 발작이 몸은 앗아갈 수 있어도 언어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처럼 레이랜드가 목숨보다 소중히 지키려고 했던 건 어쩌면 언어였다. 그는 결국 그의 언어를 지켜내고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인생의 새 막을 다시 시작했다. 

레이랜드가 성숙해 가는 과정 역시 언어와 함께였다. 출판사를 매각하지 않았더라면, 런던의 집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사람들과 생기지 않았을 사건들로 인해 그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워진다. 중요한 건 그 모든 만남 역시 언어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레이랜드라는 주인공 입장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여러 작가와 번역가와 출판사 관련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의 다양한 삶의 굴곡과 명암을 훑어보는 것만 해도 이 작품은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이들의 다양하고 독특한 모든 삶이 언어로 수렴된다는 점 또한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누군가 인간은 의미중독자라고 했다.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 성장하고 성숙하며, 또 언어로 끝이 나는 인간의 삶. 정녕 인간의 내적 발생은 언어로 말미암는가. 인간답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과연 언어를 빼고 인간다움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언어의 무게는 결국 삶의 무게이자 모든 의미의 무게이고 결국 존재의 무게가 아닐까. 이 아름다운 작품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찬찬히 읽어온 나날들이 이제 저문다. 하지만 언어로 기록한 이 감상문은 나를 새로운 막으로 인도하리라 믿는다. 내 남은 삶에 하나의 잔상을 남기면서 아름다운 무게를 더하리라 믿는다.

* 리스본행 야간열차: https://rtmodel.tistory.com/1203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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