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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
안갯속에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에 묘하게 끌리는 까닭은 나 역시 저 안갯속에 서 있다는 자각 때문일 것이다. 예전보다 후회와 미련이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더 선명해진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답 없는 상태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다만 좀 더 익숙해졌을 뿐. 적당한 체념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다. 포기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힘이 된다. 포기에서 체념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나는 지나고 있는 것이다.
정말 한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갯속에 갇혀본 적이 있다. 두려움을 느꼈다. 동시에 신비감도 느꼈다. 조금이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잠시,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더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렁이가 꿈틀대는 이유는 덜 죽었기 때문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내게 여전히 뭔가 할 수 있다는 여지가 남아 있을 땐 짙은 안개가 장애물이 될 뿐이다. 그러나 포기에서 체념으로 넘어간 사람에게 그 안개는 두려움이 아닌 신비감으로 다가온다. 짙을수록 더욱 더. 그리고 그것은 미래를 막는 장애물이 아닌 현재의 신비가 된다. 그 현재를 느낄 수 있고 붙잡게 된다.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사람의 초월이다.
그 짙은 안개가 가끔 그립다.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도 않고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가장 곤핍한 날들로 인해 결국 내가 따먹은 값지고 소중한 열매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득 모든 게 정체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도. 그렇다면 내게 필요한 건 안개인 걸까. 짙은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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