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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최진영 저, ‘구의 증명’을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5. 4. 2. 16:08

지경을 넓히는 작품을 만나다

최진영 저, ‘구의 증명’을 읽고

기발한 발상, 기구한 사건, 독특한 전개. 고전문학과 구별된 현대문학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는 나는 개인적으로 진부하리만큼 뻔하디 뻔한 이야기 속에서 빛바랜 진리에 다른 빛을 비춰 재발굴해 내는 고전문학을 선호한다. 그런 이유로 한국 현대문학은 즐겨 읽지 않는 편이다. 상상력을 키우고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을 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구도 혹은 설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 내지는 서론만 거창하다가 본론은 흐지부지해지는 상황을 자주 유도해서 소탐대실을 초래하는 걸 자주 봐왔고, 또 그런 작품들에 대한 실망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만나는 작가 최진영의 작품 ‘구의 증명‘을 읽고 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선입견이 나의 편견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며 여러 작가와 작품이 떠올랐다. 환상적인 요소가 삽입된 부분들(죽은 구가 자기 몸을 먹고 있는 담이를 바라보며 독백하기도 하고, 과거를 회상하며 구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장면들)과 구의 죽음으로 극도의 슬픔을 느끼는 담이의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들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죽은 혼이 화자로 등장하는 장면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고,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담이가 이모와 각별한 관계에 처하게 된 설정에서 읊조리는 독백은 양귀자의 ‘모순’ 속 안진진을 자연스레 소환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런 상황이나 설정만이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나는 최진영의 문체로부터 예사롭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구의 시체를 앞에 두고 초현실적인, 어쩌면 지독히 현실적일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진 담이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려내는 부분은 한강의 문체를 떠올리게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이런 인상들 덕에 나는 최진영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나의 편협한 시선에 대폭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 요컨대 나의 독서 여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띨 작품을 어쩌다 만나게 된 것이다.

현대문학답게 이 작품이 강렬한 주목을 끌게 만든 건 부모가 진 빚의 무게 때문에 살해를 당해 길바닥에 죽어 있는 구의 시체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끌고 와 정성스레 씻고 소독한 뒤 하염없이 슬픔에 빠진 담이 구의 살을 먹는 장면일 것이다. 사망신고도 하지 않고 시체를 먹는다는 설정이 엽기적이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며 구와 담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텍스트로 쓰이지 않은 콘텍스트를 읽어 내면 그런 담의 행동이 비로소 이해가 되고 공감하기에 이른다. 엽기적인 장면이 지독한 상실과 애도의 현장으로 바뀌게 되는 이 부분, 즉 기묘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상황을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인 슬픔을 극대화시킨 후 독자 모두를 애도의 현장으로 불러 모은다는 점에서 나는 저자의 저력이랄까 내공이랄까 하는 힘과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의 노른자 부위가 아닌가 한다. 

책을 다 읽고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구는 무엇을 증명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충분히 작품을 이해했다고 여겼건만 제목이 낯설게 느껴지다니.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었다. 하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고 나서는 더한 기분을 느낀 적도 있었기 때문에 제목이 와닿지 않는다고 해서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기에는 억지스러운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넘어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작품을 뒤적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십 분이 지나도 유레카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다만, 희미하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구가 증명한 것은 담이를 향한 구의 사랑이고, 구가 증명한 방법은 구의 죽음이었다는 것. 즉 구의 증명은 자신의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되면, 담이가 죽은 구를 먹는 행위도 구의 증명에 대한 화답이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심쩍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나의 작품 이해도의 최선이기에 작가에게 물어보기 전에는 이대로 그냥 두기로 한다. 

책장을 뒤져보니 ‘단 한 사람’이 보인다. 몇 달 전 최진영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구의 증명’과 함께 사두었던 것 같다. 조만간 읽어볼 예정이다. 주목할 만한 한국 작가가 생겨서, 현대문학에 대한 시선이 달라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내 지경도 넓어진다.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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