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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저, '철학 고전 강의' 4부를 읽고
이중성에 대하여: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끝없는 의심 끝에 도달한 부정할 수 없는 명징한 진리가 '의심하는 나' 혹은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말. 이렇게 신 대신 인간을 주체로 등극시키며 중세 철학을 닫고 근대 철학을 열었다고 여겨지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문장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이 한 문장이 갖는 의미와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의심하는 나의 존재를 인지한 이후 데카르트는 곧장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전통적인 순서를 뒤집은 것이었다.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아닌 조물주인 신의 존재를 먼저 상정하고 그 전제 하에 인간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중세 철학의 사유 과정이었다면, 데카르트는 순서를 거꾸로 하여 사유했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의 경계에 선 데카르트가 인간을 주체로 등극시켰다는 말의 거울상은 신을 객체로 떨어뜨렸다는 말과 같다.
전복적이라 할 수 있는 사유의 순서를 확립한 데카르트의 의미를 이해하면서도 나는 이번에 다시 데카르트를 설명하는 강유원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데카르트가 여전히 신을 버리지 못한 채 철학을 전개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말하자면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인 형이상학, 즉 이중성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주체로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성한 권위를 인지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신의 개념 자체가 사라지는 무신론의 철학이 등장하게 된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의 논리의 핵심을 나는 정반대 되는 두 개념이 서로를 비추며 서로를 정의하게 하는 원리에서 찾는다. 무한하고 영원불멸하고 완전한 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유한하고 필멸하며 불완전한 인간, 즉 의심하는 나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이라는 논리. 이 논리는 그 반대도 참이다. 마치 밝음을 정의하기 위해서 어둠의 존재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고, 어둠을 정의하기 위해서 밝음의 존재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양극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정의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점이 묘하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 이분법적으로 극명하게 나뉘는 것들의 관계를 생각한다. 선과 악, 무한과 유한, 불멸과 필멸, 완전과 불완전, 정의와 불의, 옳음과 그름 등의 개념들을 복기해 본다. 중용을 지향한답시고 무조건적으로 절반씩 취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회색분자의 생각일 것이다. 양극의 존재를 지우려 하기보다는 그대로 인지하면서 그들 사이에 놓인 긴장을 환영하고 그 긴장을 건설적으로 해석해 내는 일이 데카르트 이후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 '의심하는 나', '생각하는 나', '철학하는 나'들에게 남겨진 숙제이리라.
#라티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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