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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보그의 고백
마커스 보그 저, '마커스 보그의 고백'을 읽고
이 책은 70년이란 세월을 살아낸 마커스 보그가 그의 ‘기억’, 그가 경험한 세 가지 측면에서의 ‘회심’, 그리고 그 여정에서 얻은 ‘확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삶을 돌아보며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 관련된 생각을 정리한 역작이다.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특히 그 사람이 나이가 지긋이 든 경우라면, 내겐 우선적인 경청의 대상이 된다. 나는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채 시대의 조류와 어쩌다 맞아떨어져 연예인처럼 부와 명예와 힘을 거머쥐고 화려한 인생을 살다가 추하게 늙어버린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여럿 알고 있다. 그들의 말과 글은 공허하여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진리라면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이 진리여야 한다는 믿음이 내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어른, 진정한 믿음의 선진들이 희박해진 이 시대에 마커스 보그라는 존재는 빛나는 옥석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나오자마자 나는 손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마커스 보그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주요한 단어와 문장들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신앙은 여정이라는 것, 회심은 갑작스럽고 극적일 수도 있지만 점진적이고 점층적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 하나님은 실재하며 신비하다는 것,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건 올바른 신념, 지적으로 정확한 신학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경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여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확신일 수 있다는 것, 구원은 내세보다 여기에서의 삶에 관한 기쁜 소식이라는 것, 성서는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참일 수 있다는 것, 예수의 죽음을 대속만으로 이해하면 여러 신학적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 복음은 단순히 내면의 평안이나 영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복음은 제국에 맞서 세상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전망이자 꿈이었다는 것, 그래서 성서는 정치적이라는 것, 등의 메시지가 내 머릿속과 마음판에 견고하게 박혔다.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자.
먼저, 신앙은 여정이라는 말에서 나는 내가 언젠가부터 좋아하게 된 ‘여정’이라는 단어에 끌렸다. 그렇다. 나는 인생도 그렇지만 신앙 역시 여정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회성의 사건도, 이루어내야만 하는 어떤 성취가 아닌, 말 그대로 ‘여정’이라는 단어가 내가 견지해 온 신앙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 끊임없이 길 위에 있는 것.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늘 깨어 있으면서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는 변화의 기로들이 바로 회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커스는 대학에서 전공을 바꾸면서까지 회심을 경험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대학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라는 과목을 들으면서 지적 열정을 갖게 되면서 삶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식이 있다는 관념이 사라지고, 해방감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풍요로움뿐만 아니라 지적 다양성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서른 후반에 겪었던 회심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가 유일한 진리로 의심 없이 믿던 것들이 그저 여러 입장 혹은 의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집의 우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다양성은 반진리적이거나 비복음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의 기본에는 다양성이 있다. 생명의 다양성만을 떠올려보아도 이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할 테지만.
마커스가 경험한 두 번째 회심 역시 지적인 측면이었다. 아모스서를 읽다가 일종의 계시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세상을 더욱 정의로운 세상으로 변혁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정, 갈망, 꿈, 바람에 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그저 여러 선지서 중 하나로만 알던 책일 뿐이었으나, 마커스에게 아모스서는 성서와 정치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였고, 성서가 얼마나 강하게 경제 정의를 열망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책이었다.
마커스의 앞의 두 번의 회심이 지적 활동을 통해 일어난 것이라면, 세 번째 회심은 그것과는 달리 소위 ‘신비 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촉발되었다고 한다. 그는 홀연히 빛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 순간 모든 것이 경이로워 보이는 체험을 했다. 그는 압도되었고 의식 속에서 주객의 구분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서술한다.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는 보았고 느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가 신비주의를 신봉하거나 그것에 의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은 신비하시다. 신비한 존재를 체험하는 순간은 인간의 지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결코 지성적으로만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마커스 또한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그 순간 느낀 건 경이였다. 그는 말한다. 경이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여정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확신이라고. 하나님은 만물을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존재하게 하는 만물 그 이상의 분이시라고 담담히 고백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책의 중심이 되고 기초가 되는 확신은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 그리고 성서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곧 만물 그 이상의 분, 존재 그 자체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마커스는 이어서 구원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과 결이 다른, 그래서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칫 ‘위험한’ 발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한 마디로 구원은 내세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관한 것이라는 것. 나 역시 대한예수교 장로교 합동 측에서 신앙을 처음 가져서인지 오랫동안 구원은 죽어서 가는 천국 티켓을 받는 게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약 십 년 전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날 무렵 신앙의 재정립을 하며 마커스와 같은 결의 해석을 접하게 되었고, 그 이후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짐을 체험할 수 있었다. 마커스는 말한다. 성서가 말하는 구원이 내세에 관한 것인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이생에서의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구원이란 우리가 죽은 뒤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이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사실 마커스가 간파한 대로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전한 이야기의 핵심은 ‘죽어서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바울 역시 내세의 천국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새로운 삶이 변화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 강조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결코 구원과 동의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가진 상태로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구원은 그저 허상 혹은 망상에 머물지도 모른다. 마커스의 말은 옳다. 구원은 해방이며, 다시 연결되는 것이며, 새롭게 보는 것이며,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갈망이 충족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마커스는 성서 무오설의 허점을 짚으며 성서의 규범은 예수라고 강조한다. 마커스그 지적한 것처럼 성서 무오설은 개신교, 그 안에서도 특정 분파에서, 최근에 형성된 교리다. 로마 가톨릭 교회, 그리고 동방 정교회, 그리고 역사 속 대다수 교회에서는 한 번도 성서가 무오하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오직 성서'라는 표어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성서가 그리스도교인의 삶에서 유일무이한 권위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한 이성도 함께 강조했다. 따라서 성서의 무오성, 성서의 절대 권위라는 생각은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 신학의 발명품이다. 성서가 무오하다는 표현은 17세기 후반 개신교 신학 저작들에서 처음 등장한다. 마커스의 강조대로 나 역시 성서 무오설을 신앙의 핵심으로 여기는 건 성서를 예수보다 신봉하여 우상으로 만드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성서는 성령의 영감으로 인간이 쓴 저작물이다.
또한 성서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을 통해 쓰였기 때문에 그것이 쓰인 역시 고대 근동이라는 시대와 문화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성서는 우리에게 쓰인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와 문화가 바뀌면서 성서를 이루는 문자들은 성서가 말하는 진리를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의 한계이지 성서의 한계가 아니다. 성서의 진리는 문자에 갇히지 않고, 문자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성서를 읽을 땐 비유적 의미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마커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비유적 해석은 이야기 속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믿는 데 강조점을 두지 않고, 그 이야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고 받아들이는 데 무게를 두는 것이다. 나는 마커스의 다음 문장에 아멘을 외치며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믿음이란 실제로 일어났을 법하지 않아 보여도 이야기의 사실성을 믿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믿음은 훨씬 더 중요한 무언가와 관련이 있다.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며, 그분에게 충실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오만한 자기 확신도, 불안한 자기 의심도 아니다. 믿음은 깊은 평온함 가운데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성서는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참일 수 있다. 성서의 주요 이야기들과 주제가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진리라는 데 나 역시 확신을 가진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마커스의 통찰은 전통적인 관점, 즉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함이라는 ‘대속’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부분 또한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겐 ‘불편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커스의 설명은 들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먼저 ‘대속’은 1098년 수도사이자 사제, 수도원장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무스가 처음으로 체계화한 개념이다. 신학사에서의 새로운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대속은 별다른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안셀무스는 영주와 봉신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적용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 없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여길 것이라는 논리였다. 반드시 대가는 치러야 했다. 같은 논리로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은 그래서 필요하다고 결론이 지어진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었기 때문에 죄 없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우리를 대신해 죗값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커스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만으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신학적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첫째, 하느님께서 예수의 죽음을 계획하신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둘째, 하나님이 불순종에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전제군주로 이해하게 만든다. 셋째, 예수의 죽음만 강조하게 되어 죽기 전 그의 삶과 가르침과 활동의 중요성을 가리게 된다. 넷째, 우리가 믿는 것이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게 만든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가 대신해주었다고 믿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 네 가지 문제들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며, 나는 마커스의 견해에 동의가 된다. 사복음서에를 수십 번 읽어보고 목사님으로부터 설교도 수없이 들어왔지만, 예수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으며, 그 하나님 나라는 내세가 아니었고, 그의 가르침은 천국에 가는 법이 아닌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는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논리 저번에도 예수가 살아낸 삶이 있는 것이지 않은가. 예수의 탄생과 죽음만으로 예수의 복음을 이해한다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마커스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사건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가릴 뿐 아니라 아예 지워버린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협으로 여긴 권력자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누군가가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복음서도 예수가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죽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이 또한 동의가 되었다. 복음은 단순히 내면의 평안이나 영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인 구원만을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복음은 제국에 맞서 세상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전망이자 꿈이었다는 마커스의 말은 이런 점에서 지극히 옳다.
마커스 보그라는 신학자 덕분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 대한 깊고 풍성한 통찰을 얻는다. 성서는 정치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의 제자라는 말이 담고 있는 함의 역시 정치적이라는 관점을 빼고서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도 얻게 된다. 그의 다른 책, ‘기독교의 심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기대가 된다.
#비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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