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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성장, 작품으로 말하다
문지혁 저, ‘당신이 준 것’을 읽고
KISS
거의 이십 년 전 대학원 워크숍에서 썼던, A4지 한 장 정도 분량의 초단편 소설. 첫 문장부터 긴장과 스릴을 조성하다가 외통수의 마지막 문장으로 끝나는 강렬한 작품. 제목의 철자를 다시 보게 되고 작품 속 공간이 어딘지 재차 확인하게 되는 이야기. 초단편 소설은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하는 걸 보란 듯 보여주는 작품.
강과 맥주
완결성을 갖는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아주 작은 한 장면을 묘사한 듯한 작품.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며 맥주만 홀짝거리는 한 남자와 마음이 이미 많이 멀어진 듯, 식은 듯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가야 한다며 먼저 일어나 가버린 여자. 여자의 맥주는 거의 마시지도 않은 상태였다. 시간은 남자와 여자에게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맥주를 세 캔이나 마시던 남자에게 시간은 홀짝대는 만큼 멈추고 있었으나, 맥주를 거의 마시지도 않은 채 침묵을 지켰던 여자에게 시간은 무겁고 느리게 계속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먼저 입을 열고 일어나 가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멈출 필요가 없어진, 홀로 남겨진 남자는 여자가 남긴 맥주를 마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강물에 그냥 흘려보낸다. 하지만 네 개의 빈 캔은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간다. 미련이었을 것이다.
7초만 더
기다리던 메시지는 그녀에게 고백을 한 뒤 2주 만에 왔다. 유니온 스퀘어에서 만나자는 건조한 텍스트가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 그는 평소에 타지 않던 라인의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향한다. 운명이었을까. 그가 무작위로 튼 곡 제목은 ‘추억과 함께 영원히 둘로 남는다’였고,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방화범의 방화로 그는 곡이 끝나기 7초 전 생을 마감한다. 7초가 더 지나도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가 바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마치 그 곡을 끝까지 들으면 혼자가 아니라 둘로 남을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결국 ’추억과 함께 영원히‘까지만 듣고 ‘둘로 남는다‘는 듣지 못했다.
굿나잇, 웨스트엔드
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덴마크 출신의 교사 라리사를 화자는 종강파티 2차를 가기 직전에 찾는다. 그녀의 집으로 택시를 타고 달린다. 건물에 도착했으나 어느 집이 그녀의 집인지 모른 채, 머릿속에서 많은 문장을 만들었지만 우물쭈물하다가 전화도 하지 못하고 그는 문자 하나만 달랑 넣고 만다. Good night. 그리고 다시 2차 장소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남자가 애절하다는 느낌보다 찌질하다는 생각이 남는 작품. 아마도 내가 더 이상 이십 대가 아니라 그런 것이리라.
싱글 허니문
청첩장도 돌리고 여러 예약도 하고 신혼여행도 예약한 젊은 예비부부 이야기. 예비 신부는 결혼 3주 전 급작사로 세상을 떠난다. 아내가 될 여자가 사라진 ‘무의미‘와 싸우면서 어쩌다 혼자 살아남게 된 남자는 여자가 도맡아 준비했던 신혼여행을 취소하지 않고 혼자 떠나기로 한다. 세계 3대 야경을 볼 수 있는 한 곳, 하코다테였다. 호텔에만 처박혀 있다가 체크아웃을 하고 전망대에 오른 그는 호텔에서 썼던 편지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홀로 선 전망대에서 날린다. 까마귀 떼가 그것을 잽싸게 잡아채 하강하는 장면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는 저녁 비행기 시간에 개의치 않고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서 있는다. 죽은 예비 신부의 전령이었을까. 야경을 보지도 않고 돌아가려는 남자를 사로잡는 그 장면은.
핏자국
카페에서 발견한 핏자국을 ‘그 핏자국‘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소설을 쓰는 일임을 말해주는 이야기. 문지혁 작가의 짧은 수업을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자인 듯한 화자는 정체 모를 핏자국으로부터 남녀 사이의 이별 장면을 상상하며 손목을 그은 여자를 떠올린다. 그렇다. 아주 작은 재료로도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소설은 그런 것이다.
얼음과 달
‘핏자국’에 이어 허구적 상상력은 이렇게 작동하는 거다,라는 예시를 보여주는 작품. 한 여자에게 술을 얻어 마시고 잠에서 깼는데 얼음 욕조 안에 있더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 그 남자는 신장을 도둑맞은 직후였다. 그리고 매일 괴물이 되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이 연출되고 끝내 살아남게 되는 한 여자의 이야기. 여자가 가까스로 탈출한 날 밤은 언제나 붉은색의 만월이었다. 화자가 술집에서 그 여자와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여자가 먼저 떠나고 밖을 나왔는데, 갑자기 코가 사라진 남자가 와서 자기 배를 찌른다. 하늘을 보니 붉은빛 만월이었다. 단편소설만이 줄 수 있는 이런 과감하고 조각난 상상력의 향연.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런 식의 소설을 읽고 나면 똥 싸고 제대로 닦지 않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무책임함’이 단편소설의 독특한 맛이리라.
당신이 준
이야기가 막 진행되려 하는 차에 끝나버리고 마는 듯한 소설. 예전에 선물 받았던 오르골의 의미를 소설이 조금만 더 진행이 되면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아 아쉬운 작품. ‘당신이 준 시간‘이라는 메시지도 모호하기만 한 작품. 몇 페이지만 더 저자가 써줬으면 싶었던 이야기.
체이서
SF 소설. 안드로이드인 주인공은 탐정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부터 시작된 오래된 일이지만, 안드로이드가 안드로이드를 대하는 방식도 작품 속에서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설정이다. 살인사건 해결로 목돈을 마련하여 안과 수술을 받으려는 주인공 안드로이드와 그와 친분이 있는 경찰 안드로이드 프랭크. 프랭크는 주인공이 안과에서 마취를 당했을 때 이용당했음을 간파해 내고 주인공을 살인사건 용의자로 체포하려 한다. 기지를 발휘하여 주인공은 프랭크를 공격하고 서로의 칩을 맞바꾸는 선택을 한 뒤 실행에 옮긴다. 안드로이드에게도 정체성이란 게 있는지, 중요한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묻는 듯한 이야기. 이 책을 구성하는 열두 편의 짧은 소설 중 꽤 긴 작품임에도 내겐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여전히 모호하게 다가왔다. 장편으로 확장하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을 했다.
홀 시커
역시 SF. 외계인은 물론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공간 속 이야기. 주인공은 가방 속 알 수 없는 책 한 권을 읽으며 먼 출장길에 오른다. 그 책은 지구동공설에 관련된 책이었고, 언젠가 사라졌다던 할아버지 이름도 적혀 있었다. 주인공의 아버지 역시 우주 싱글라이딩을 하다가 어느 날 돌아오지 않은 채 행방불명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듯한, 아버지가 마지막 모습을 보였던 좌표 가까이 가게 된 주인공은 자신이 가지고 간 혈액샘플이 반지 형태로 가운데 구멍이 생긴 모양새를 하게 된 것을 샘플 문제로만 여겼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블랙홀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지구의 구멍을 찾는 자, 홀 시커를 우습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홀 시커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작품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우주의 구멍 블랙홀을 찾게 되고 빨려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지구의 구멍과 우주의 구멍을 연결시킨 이야기. 앞뒤의 연결에 어색하고 뜬금없다는 인상이 강했던 소설. 역시 장편으로 확장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이 책에 실린 열두 편의 작품 중 긴 편에 속하는데 읽는 내내 엉덩이에 힘을 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했던 소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의 전개는 물론 불친절한 연결조차 작품성을 더 훌륭하게 만든 것처럼 느껴졌던 작품. 완전한 결론이 나지 않아 여전히 궁금함이 남았지만, 정유정의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까지 든 수작이었다. 다이아몬드와 연필의 대비도, 꽃반지와 다이아몬드 반지의 대비도 그 상징성을 잘 드러내 주었다. 택배 주인을 알게 되기까지의 주인공 부부의 모습들에서도 나는 인간 본성과 심리를 통찰할 수 있었다. 문지혁 작가가 이런 유형의 소설을 장편으로 쓰면 딱이겠다는 강렬한 생각이 들었다. 써주세요 작가님~ 제2의 정유정 작가로~
멸종과 생존
이 책의 저자인 문지혁 작가가 등장하는 소설. 그러나 시간대는 현재가 아니다. 살짝 디스토피아의 뉘앙스마저 느껴지는, 몇 년 혹은 몇십 년 뒤일까, 아니 오지 않길 바라야 하는 시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북토크를 한다. 종이책도 마지막인 듯하다. 출판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문지혁 작가의 우려가 허구적 상상력을 입고 구체화된 현실일 것이다. 고등학생인 첫아들이 북토크가 끝날 무렵 들어와 종이로 만들어진 포스터를 가져도 되냐고 묻는다. 학교 과제를 하기 위해서였다. 주로 새벽에 작업을 하는 작가에게 이메일이 온다. 첫아들이 보낸 거다. 발표자료를 검토해 달라는 부탁인데 첨부파일 제목이 ‘멸종과 생존: 종이책이 사라진 39가지 이유와 생존자를 아빠로 둔 나의 북 토크 탐방기’였다. 작품은 주인공이 아들에게 피드백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문지혁 작가의 종이책에 대한 염원과 사랑이 담긴 글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종이책이 영원하길 바란다.
총평
눈여겨보고 있는 차세대 한국작가 문지혁의 일대기 혹은 성장기를 그의 자서전이 아니라 작품으로 읽은 느낌이랄까. 극초단편부터 초단편, 단편까지 여러 분량, 그리고 스릴러, SF, 드라마 등에 이르는 여러 장르를 뛰어넘는 열두 편의 작품들을 읽으며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문지혁 작가의 사상과 시선, 작품 속에 녹아든 그의 고유한 정서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생각. 다른 하나는 소설가의 성장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구나, 하는 깨달음.
둘 다 내겐 유익했다. 무엇보다 문지혁 작가가 강사로 수업하는 내용의 청사진을 작품으로 본 것 같아서 좋았다. 소설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이런 식으로 상황을 전개하고 반전을 주는구나, 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나도 소설 습작을 하는 취미가 있고 언젠간 멋진 장편을 하나 쓰려고 염두에 두고 있는 터라 내게 이 책은 하나의 소설 쓰는 교본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위에서 각 작품에 대한 감상을 짧게 나누면서 잠시 언급했지만, 문지혁 작가에게는 정유정 작가 스타일의 스릴러, 그리고 ’고잉 홈‘에서 물낀 풍겼던 이민자만의 고유한 정서와 감성 혹은 문화를 소외나 배제 혹은 소수자라는 개념과 연결 지어 아련한 느낌을 주는 소설 형식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작품을 더 써주길 기대하게 된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 문지혁 읽기
1.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
2. 고잉 홈: https://rtmodel.tistory.com/2046
3. 당신이 준 것: https://rtmodel.tistory.com/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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