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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겸손
십여 년 전이다. 나는 마치 속고 살다가 뒤늦게 중요한 걸 깨달은 사람처럼 다짐했다. 앞으론 근시안적으로 살겠노라고. 계획할 수 없는, 아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먼 미래를 위해 나의 현재를 땔감으로 사용하던 내 모습이 부질없이 느껴지던 어느 날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어떤 한 지점을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후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애썼다. 눈이 바뀐 사람의 실천은 가파르게 올라가는 경사처럼 빠른 시간 내에 만족감을 주게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 과거와 달라진 내 시선과 행동에 자족했고 행복을 느꼈다. 거대함이 아닌 소소함에 눈을 돌리고 애정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몇 년 후 어느 날, 어떤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나와 비슷한 여정을 거친 듯했다.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게 너무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그 말이 아닌 그 말을 듣고 일어난 내 몸과 마음의 반응 때문이었다. 요컨대 그 말이 내겐 너무 가볍게 느껴졌던 것이다. 덩달아 그 말을 내뱉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왜 그렇게 느껴졌을까? 집에 와서 생각했다. 며칠을 고민했다. 내가 내린 답은 이것이었다. 그 사람의 근시안적인 모습이 불편했기 때문이라는 것.
모순이었다. 근시안적인 삶을 살려고 다짐했고, 실제로 그렇게 애썼던 내가 나와 비슷한 인생관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으로부터 동질감 혹은 연대감이 아닌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럼 실제로 내가 추구했던 삶이 근시안적인 삶이 아니었다는 말인지, 그게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추구했다는 말인지 묻고 또 물었다.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여러 생각들로 어지럽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대답에 수렴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추구했던 근시안적인 삶은 다분히 내가 아닌 타자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서였다는 것. 거대 담론에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소비하는 주류에 속해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그대로 품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런 것들엔 관심도 없고 그저 길 가에 핀 꽃이나 주위 사람들과의 소소한 만남들, 그리고 유유자적하게 홀로 읽고 쓰는 삶을 실천하는 새로운 내 모습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인정받고 싶었고, 대단한 사람이란 걸 증명해내고 싶었다. 삶의 외형은 바뀌었지만 내 안의 은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함부로 소확행을 추구하는 삶이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의 삶인 것처럼, 마치 현세를 초탈하여 고고하고 우아한 삶을 사는 것처럼 떠들지 않는다. 그리고 내 안의 모순된 두 가지 모습을 이제는 이율배반적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여전히 내밀한 욕망에 영향을 받는 인간인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인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예전에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내가 불편했던 건 아마도 그 사람의 거리낌 없는 자신만만함이었던 것 같다. 마치 과거를 깔끔하게 지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처럼, 마치 아무런 갈등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인간은 갈등하는 존재다. 사람의 진정성도 어쩌면 갈등하는 모습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모순을 이율배반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겪으며 나는 조금 성장하는 것 같다. 무언가를 바란다고 해서, 그 관점을 지향한다고 해서 과거에 추구하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이 이중성을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이것이 겸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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