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박제된 용어에 생기를
프레드릭 비크너 저, '통쾌한 희망사전'을 읽고
박제된 교회 용어들에 신물이 날 때마다 더럭 겁이 났던 이유는 내 신앙이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라 공중에 붕 뜬 채 냄새도 맛도 나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유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안전지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신앙은 변화시켜야 할 세상을 어떻게든 도피할 장소로 여기게 만든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다. 진공 속에서 위로와 치유만 선사해 주는 게으른 마법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단순한 지적 동의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삶의 기준이자 렌즈로써 그것을 실제 몸으로 살아내는 모든 실천을 포괄한다. 반면, 종교적인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삶을 변화시킬 힘이 전혀 없는 신앙은 살아있는 생명력과 실천을 잃어버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신앙, 즉 박제된 신앙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지속하고 있는 이들은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자신의 신앙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박제화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으면 결국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는 신앙으로 전락되고 말지도 모르니까.
익숙하던 모든 것들은 의심할 가치가 있다. 그것이 설사 나를 살려주었던 믿음과 신앙이라도 마찬가지다. 의심은 믿음의 적이 아니다. 의심은 믿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게 한다. 의심의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지 못한 믿음은 확신의 죄에 빠진 채 미풍에도 쉽게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교회 용어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익숙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늘 같은 단어, 같은 문장, 같은 맥락의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똑같은 예배를 하고 똑같은 주일을 보내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가 주신 평안은 단순히 기계적인 익숙함이 아닐 것이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풍지대는 평화가 아닌 죽음의 장소일 뿐이다.
비크너의 '통쾌한 희망사전'을 두 달에 걸쳐 천천히 읽으며 무미건조하고 무채색이었던 내 신앙의 단면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익숙함에 젖어 그것이 마치 안전한 평화이자 건강한 신앙인 것처럼 나 자신을 별 문제없는 신앙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비크너의 글은 언제나 그렇듯 폐부를 찔러 쪼깨는 힘이 있다. 평범하게만 보이는 그의 문장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어느새 나는 그 안에서 의도된 하나님의 신비를 경이와 함께 보게 된다. 평범 속의 비범, 비크너의 매력 포인트이지 않을까.
다양한 교회 용어들에 대한 비크너 나름대로의 정의를 사전식으로 부여한 책이다. 그렇다고 주관적이지만은 않다. 객관을 전제로 한 주관이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사전 편찬자인 비크너 개인의 신앙이 더욱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사전적 정의들은 허를 찌르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며,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다가, 깔깔대며 웃게도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반응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다시 점검하고 깨어 있게 한다. 가나다 순으로 이뤄져 있다.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궁금한 단어가 위치한 곳을 찾아 발췌독을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단어들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크너는 그런 작가이다. 그의 매력은 이런 사전식의 책에서도 여전히 통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 프레드릭 비크너 읽기
1. 주목할 만한 일상: https://rtmodel.tistory.com/762
2.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https://rtmodel.tistory.com/1059
3. 진리를 말하다: https://rtmodel.tistory.com/1783
4. 통쾌한 희망사전: https://rtmodel.tistory.com/2245
'김영웅의책과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기원 저,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를 읽고 (0) | 2026.08.28 |
|---|---|
|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_’몸과 살, 그리고 세계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를 읽고 (0) | 2026.08.26 |
| 김현아 저,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읽고 (0) | 2026.08.24 |
| 제임스 엘로이 저, ‘블랙 달리아’를 읽고 (0) | 2026.08.24 |
| 호메로스 저, '오뒷세이아'를 읽고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오디세이'를 보고 (0) | 2026.08.21 |
-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