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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고독의 의미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2. 10. 08:02

(고도원의 "절대고독"에서의 고독 vs. 루스 헤일리 바턴의 "고독과 침묵"에서의 고독)


외롭고, 고통스러우며,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시간.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으며, 대신해 줄 수도 없는 광막한 시간. 익숙한 두려움에 휩싸이는 처절한 시간. 때론 그 적막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하여 이기지 못할 줄 알면서도 치열한 싸움에 임하는 시간.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공간에도 숨결처럼 늘 상주하고 있는, 그래서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인간인 이상 도저히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 자신의 내면을, 인간의 존재를 대면하게 되는 솔직한 시간.


고독.


고독의 일견의 겉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 두 책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고독의 필요성이라든지, 고독을 마주할 때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받아들이라는 대처법에 있어서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독의 유익과 목적에 대해서는 달리 한다.


그 차이점은 두 저자의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다. 다시 말해, 고도원과 루스 헤일리 바턴이 고독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는 고독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드러났을 뿐이지 그들의 내면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가치관 혹은 세계관의 현격한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먼저, 고도원이 얘기하는 고독과 고독을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인생을 개척하는 것은 자기 할 나름이다. 아무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 자유는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다. 마음의 감옥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라. 마음의 힘은 한계가 없으니 그 힘을 길러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라. 하늘에 맡기기 전에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먼저 해야 한다. 최선을 다한 다음을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마음 닦기와 마음 공부가 중요하다. 행복은 100%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자신 있게 사는 것이 자신답게 사는 것이다.”


반면, 루스 헤일리 바턴이 얘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고독과 침묵은 인간의 불행과 죄의 근원을 가장 직접적으로 공략하기에 가장 근본적인 영적 훈련이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오히려 혼자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고독과 침묵은 번잡한 영혼에게 가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쓰라고 있는 사치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는 인간의 관념과 노력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 마음을 여는 구체적인 길이다. 자신의 통제권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고독과 침묵에 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권한이 없는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다. 특히 침묵의 연습은 영적 삶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존중한다. 분별력은 억지로 쥐어짜는 인간의 생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순전한 선물이다. 고독은 비우는 과정이 수반되지만,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비움은 채움의 선결 조건일 뿐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존재를 직시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영혼에 채워지게 되는 것이 고독의 목적이자 선물이다.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인간 존재의 기반이다.”


고도원의 “절대고독”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고독을 통하여 자신과 대면하여 성찰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 얻은 긍정적인 힘으로 보다 나은 나를 만들 수 있으며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루스 헤일리 바턴의 “고독과 침묵”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고독을 통하여 자신과 대면하여 성찰도 할 수 있으나, 그 성찰은 곧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해져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며, 인생에서 구별된 존재로, 남을 섬기며 사랑하는 존재로 살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같은 고독이란 대상을 놓고 이처럼 현격한 해석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두 저자의 현격한 세계관의 차이다. 그리고 그 세계관의 차이의 핵심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고도원의 세계관의 중심에는 “나 자신”이 있으며, 루스 헤일리 바턴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있다. 고도원은 고독에 인생 성공의 수단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루스 헤일리 바턴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영적 훈련의 의미를 부여한다.


고도원은 고독이 왔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받아들이고 그 고독 속에서 자기를 비우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조용히 새 힘을 얻으라고 조언하지만, 막상 인간이 고독의 심연 속에 잠겼을 때 어떻게 자기를 비울 수 있는지 어떻게 그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인간 내부에 있는 정신적인 차원의 능력으로 고독을 다룰 수 있고 그것을 잘 다룬다면 행복과 성공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 고도원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의 성공적인 약력이 책에 첨부되어 있는데, 난 그 약력이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반면, 루스 헤일리 바턴은 무리뭉실한 “긍정적인 생각” 대신,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원래 인간의 모습,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모습을 언급하며, 철저히 혼자인 시간인 고독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믿음과 신뢰가 회복되는,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얘기한다. 인간 존재의 의미가 하나님을 배제하고는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세계관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갈 때 정작 필요한 질문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것이다. 난 고독이 그러한 답을 도출하는데 필수적인 통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혜있는 자들과 믿음의 선진들의 글을 통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 정보가 자신에게 답이 되기 위해선 결국 고독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고 믿는다. 묵상은 고독 중에 존재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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