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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모순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8. 4. 02:25

박경리의 "토지" 첫 권을 읽어내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기 때문도, 시대가 다르기 때문도 아니다.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일까. 왜 다른 나라 작가들의 소설책을 읽을 때보다 낯설게 느껴진 걸까. 그 작품들 또한 고전이라 시대가 다른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그리고 사투리가 영어보단 분명 친숙할 텐데도 (나 역시 부산 태생), 읽는 내내 난 어색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우리 나라 고유의 작품이자 우리 나라가 자랑하는 작품인 "토지"에 대한 나의 반응은 이렇게 내 스스로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생뚱맞지 않게 느껴졌던 거다.


중고등학생 시절을 돌이켜본다. 국사보단 세계사가 재미있었다. 각 과목의 선생님에 대한 선호도도 작용했을 테고 "먼 나라 이웃나라" 같은 재미있는 만화책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나, 국사는 늘 어둡고 지저분한 느낌이 강했다. 반면, 세계사는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밝은 느낌이었다. 국사는 무속적이고 음산했으며 무식하게까지 느껴졌고, 세계사는 어릴 적 영화 속에서 본 백인들의 첫 인상 때문인지 우월하게 느껴졌고 합리적이고 학식 있게 느껴졌었다. 부끄럽지만 이게 과장하지 않은 나의 십대 시절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던 것 같다.


내 안에서 모순을 본다. 피부색이며 출신국가, 정치성향, 종교 등의 모든 부차적인 조건을 떠나 인간이라는 공통분모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래서 어떤 조건 때문에 차별을 당하는 일이 생기면 의분이 생기고 정의를 부르짖고 싶은 마음도 너무나 당연하지만, 내 안에는 어릴 적부터 각인된 뿌리 깊은 백인들에 대한 인상이 있다. 그 우월함에 대한 동경심. 이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나에겐 좀더 민감하게 느껴진다. 백인들로부터 고급스럽게 포장된 암묵적인 차별을 받아보며 XX 같다며 사무치게 분노하기도 하지만, 흑인들이나 히스패닉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에겐 내가 마치 백인의 입장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에, 괜시리 우쭐해하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백인들과 흑인/히스패닉 사이의 중간 어느 쯤인가 있을 거라는, 아무 근거 없는 생각이 이 쪼그만 대갈통에 꽈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은 우리나라 사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면 그 누가 가질 수 있을까. 유대인이나 아리안인같이 선민사상, 국가우월주의에 빠질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국가와 국민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는 말아야 할텐데 말이다.


정권교체가 가시화되었다. 상식이 통하고, 가장 큰 공통분모인 '한국사람'이라는 데에는 적어도 이 세상 곳곳에 흩어진 이민자들 모두가 함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사를 공부하다가 2017년 현대사를 읽으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의 국민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 어느 나라의 역사를 공부할 때보다 자랑스럽게 여겨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비록 암흑 같던 시기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국엔 뿌리가 뽑혀지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 희망의 역사가 바로 우리나라 역사임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후대들이 국사를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고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자랑스럽게 공부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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