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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나 한 공동체, 그리고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들여다 본다. 지나간 과거가 적혀 있는 역사책을 펼쳐 볼 때면, 우린 신이 된다. 그 대상의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을 이미 훤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의 발단과 흥함을 관찰할 때면, 더 그렇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허무함에 한숨을 쉬기도 한다. 함부로 비판하고 함부로 비난하고 함부로 동질감도 가진다.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린 경솔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를 알 수 없는 인간의 한계는 경솔해짐의 강력한 차단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를 안다면, 좋은 쪽으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겠지만, 인간에게 그 ‘좋은’ 쪽이란 절대적으로 자기 중심에서 판단한 관점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극은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미래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는 것처럼 교만해질 수 있고 그래서 신처럼 되려하는 것에 있다. 무엇이 좋은 건지 결코 분별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한계가 아닐까 한다.
심판이 구원의 이면이듯, 한계는 자유함의 이면이다. 어쩌면 경솔해짐과 교만해짐 역시 그 자유함의 결과다. 모르기 때문에 까불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우린 모르기 때문에 서로 믿고 의지할 수도 있다. 이유는 같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다. 믿음과 신뢰란 모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모름의 한계는 우리에게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자유함을 허락한다. 이 한계는 양날의 검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한계를 자유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키는 우리에게 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믿음과 신뢰의 방향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신다고 난 믿는다. 그러나 죄의 흔적은 힘이 세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너무나도 쉽게 이겨 버린다. 그래서 우린 쉽게 경솔해지고 교만해지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성령도 다 파악한 것처럼 함부로 까부는 것이다.
누군가는, 마치 우리들이 역사책을 들여다보며 신이 되는 것처럼 느끼듯, 우리들의 현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얼마나 코미디일까? 곧 있으면 나락으로 떨어질텐데도 주제넘게 자신이 모든 것을움직이는 사람처럼 교만해져 있는 사람이나, 머지않아 욥이 고난 후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듯 현재 겪는 험난한 고난이 모두 사라지고 회복될 뿐 아니라 전무후무할 축복 속에 들어갈 사람도, 너나 할 것 없이 얼마나 웃길까 상상해 본다 (물론 모든 자잘한 행동들이 다 예정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상상을 하는 건 아님). 그리고 더 겸손해 져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모든 게 운명처럼 결정되어 있지도 않겠지만, 어쨌거나 우린 역사책에 어떻게든 시작과 마침으로 기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나의 작은 인생의 드라마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나라의 냄새라도 맡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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