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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ASH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12. 14. 06:08

내 생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학회가 열리는 첫 날, 여기 애틀랜타에는 눈이 내렸다. 이렇게 많은 눈이 온 것은 10년 만에 처음이라는 말까지도 식당 아주머니로부터 들었다. 클리블랜드와 인디애나, 그리고 보스턴의 눈과 겨울을 경험했던 나로선 어제 내린 눈이 솔직히 눈으로 보이지도 않았으나, 여기 따뜻한 남쪽 나라인 애틀랜타에게는 큰 타격이었던 것이다. 아마 눈에 대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실한 캘리포니아의 태양에 슬슬 따분함을 느끼던 찰나, 내게는 여기 내린 눈이 마치 날 반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의 첫 애틀랜타의 방문이 이렇게 극적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혹시라도 눈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난 이렇게 눈과 함께 찾아 온 겨울의 애틀랜타를 즐긴다. 난 충분히 이기적이다.


내가 참석하고 있는 학회의 이름은 ASH 이다. American Society of Hematology 의 약자이며, 미국에서, 아니 아마도 전 세계에서 Hematology 분야에서는 가장 큰 학회일 것이다. 이번에는 2만 6천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몇 달 전, 초록을 제출했었는데,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구두 발표자로 벌컥 선정이 되었다. 보스도 나도 어이가 없을 만큼 뜻밖의 결과였다.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이는 나를 격려한답시고 보스는 ASH라는 학회가 가지는 위상이 어느 정도이며, 구두 발표자로 선정되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일인지 연신 강조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여간 해서는 설득이 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ASH라는 이름이 내겐 마치 한줌의 '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부질없는 일로 여겨진 것이다.


오늘 12시 15분, 수백 명의 관중들 앞에 있는 연단에 서서 그 동안 밥과 잠을 희생해가며 준비했던 발표를 했다. 20장의 꽉 찬 슬라이드를 10분 내로 설명해 내야 했다. 물론 영어로 말이다.


보스는 어제 밤 10시 반쯤 내가 머무는 호텔 로비에 와서 전화를 했다. 리허설을 해 보라고 했다. 로비로 내려갔다. 끊임없이 수정되어지는 스크립트와 슬라이드에 진이 빠져 있을 때였다. 그녀는 또 바꿨다.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존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려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인간은 철저히 스스로를 위하면서도 완벽히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자기자신조차 속일 수 있는 기이한 재능을 가진 동물인 것이다.


사이언스가 좋아서 여기까지 왔다. 숱한 갈등과 고난을 넘었다. 그래도 참고 이겨냈다. 그런데 이젠 사이언스에 대한 흥미가 전혀 예전 같지 않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마침내 주어졌는데, 이는 내겐 오히려 내 마음이 사이언스로부터 무시할 수 없는 거리가 충분히 생겼음을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해냈다. 뜻밖의 기회가 뜻밖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마치 뜻밖의 눈이 여기 애틀랜타를 찾은 것처럼 말이다.


발표를 잘했다고 보스가 칭찬해줬다. 사람들 반응이 좋았단다. 그나마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난 읽을 수 있었다. 걱정했던 만큼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그 의미를 말이다.


피곤하다. 캘리포니아에서부터 3시간 미래로 와 있는 상태라 그런지, 발표 때문에 긴장했던 것이 풀려서 그런지 몹시 피곤하다. 잠도 안 올만큼.


호텔로 돌아올 때 내 얼굴을 스치던 차가운 대기가 참 좋았다.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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