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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신학 관련 도서들을 새롭게 구입해서 읽는 방법 말고도 이미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방법도 사용할 계획입니다. 신학적인 배경이 전무한 아마추어라 예습보단 복습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새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단,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며 제대로 이해한다면 신학적인 안목을 갖는 저의 목적에 더 빨리 이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은 저의 다시 읽기 시리즈의 첫 책을 읽고 쓴, 서평과 감상문의 중간 어디 쯤 있을 것 같은 글입니다.**
“사리사욕을 위한 성경읽기를 파면한다!”
김근주 (Keunjoo Kim) 저,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를 읽고.
다들 한 번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새해를 맞아 적어도 한 번 이상 성경을 읽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아주 좋은 생각이다. 나도 그 중 하나다. 나는 1년 1독의 일상화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는 실천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읽는 목적이 무엇인지, 왜 읽고자 하는지, 왜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짚어본 적이 언제 있었던가.
좀 더 경건해지고자, 좀 더 착해지고자, 아니면 좀 더 진취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 의지의 반영은 아닐까? 우리의 소원성취와 문제해결을 위해 성경책을 집어든 건 아닐까? 교회 다니니까 성경을 택했을 뿐, 만약 다른 종교를 가졌다면 그 종교에 맞는 경전을 택하지 않았을까? 종교가 없다면, 세상에 좋은 책이 어디 한 둘인가. 우리의 목적이 단지 그런 것들이라면, 굳이 성경책을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두껍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칠전팔기의 인내를 가지고 도전을 한다 해도 작심삼일, 마치 수학 정석의 집합 부분만 시꺼멓게 때가 타듯, 창세기나 마태복음에서 밑줄만 긋다 끝나던지, 요령 있는 자는 시편이나 잠언으로 성큼 건너 뛰어보지만, 중도에서 포기할 확률이 높다. 성경은 아무나 읽을 수 있지만 누구나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락 (사랑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문맥을 고려한 성경해석이라도 중구난방일 가능성이 높다.
큐티 교제로 도움을 받는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무작위적으로 주어지는 그날의 본문 말씀에서 반드시 오늘 적용할 부분을 찾아야만 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까지 해야하는 부담감도 느끼게 된다. 성경 자체를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선택적으로 발췌해서 읽는 거라 큐티는 대부분 개인 차원에서의 영성 기르기에 그친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성경읽기가, 그리고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이 사적인 영역으로 숨어버린 슬픈 현상을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코 개인의 이익과 안녕에 있지 않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우린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도 같다. 결코 참고서나 자기계발서로 주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읽기는 '나'를 넘어서야만 본래의 목적에 이를 수 있다.
탄핵 정국이 물이 올랐을 2016년 말,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라는 제목으로 김근주 교수 - 서양에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김근주 교수가 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나로선 우리나라에 김근주 교수 같은 신학자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참 감사하다. - 가 책을 하나 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책이 독립적으로 새 표지를 가지고 출판된 날짜는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전원일치로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날과 일치한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 전에 성서유니온으로부터 SU 신학총서를 구입할 때 따라온 기프트북 버전으로 먼저 읽는 행운을 누렸다. 1년이 넘게 지난 2018년 1월 현재, 난 다시 이 책을 찾았다. 1년 1독을 하기 전, 바른 자세를 가지고 바른 방향으로 성경읽기를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세야 4:6절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의 ‘지식’이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 (새번역에는 이 문장의 목적어가 등장한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 김근주 교수는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성경읽기의 목적이라고 단단히 못을 박는다. 예레미야 9:24에 나오는 ‘나를 아는 것’과 로마서 12:2에 나오는 바울의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권면에서도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죄악으로 점점 악해져만 가는 이 세상에서 멸망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들의 어떤 의미심장한 실천이나 거룩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성경이 어떤 책이며 왜 주어졌으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책이 쓰여진 이유이다.
성경은 전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사람을 통해 쓰여진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성경 기자가 처했던 시대와 상황, 그때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반영되지 않을 수가 없다. 구약과 신약 모두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쓰여졌지만, 결코 성령이 불러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 썼다고 보는 축자영감설이나,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문자주의, 성경에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보는 성경무오설 등으로만 해석하는 근본주의자들의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의 권위는 그런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미신과도 같은 설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험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도록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다는 데에서 온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무턱대고 “아멘”하며 모든 본문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비판적으로 조곤조곤 따져보고 검토해 보며 읽어야 한다. 김근주 교수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다. “성경 앞에 우리의 의문을 내려놓을 것이 아니라, 성경 앞에 우리의 모든 의문을 제기하고 이야기해 보자.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다.” 너무나 옳으며, 명쾌하고 통쾌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외에도 성경읽기의 방법들에 대해서 간단하고 명쾌하게 이 책은 정리를 하고 있다. 180여 페이지 분량, 12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비교적 짧은 책이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더 이상의 요약은 하지 않겠다. 다만,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가슴 펑 뚫리는 시원한 그의 필체와 문장력 덕분에 이 책을 집어든 독자들은 아마도 어렵지 않게 책 한 권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김근주 교수의 그 다음 저서인 ‘복음의 공공성’이 이미 보인다. 그만큼 김근주 교수는 현대인들의 성경읽기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이 바로 사사롭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성경읽기를 (기독교 신앙을) 끌고 들어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책 전반에 걸쳐 그의 이러한 관점은 끊이지 않는다. 사실 제목만 봐도 이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나 ‘복음의 공공성’을 보라). 그리고 난 작년 탄핵정국이 한창일 때 24시간 주님만 바라보자는 유기성 목사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에 달린, 사적인 복음을 경계하고 비판하며 복음의 공공성을 부르짖는 그의 단호하고 직접적인 댓글을 똑똑히 기억한다. 김근주 교수는 공적인 복음에 대한 한이 “겁나” 크게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이 출판된 날짜가 가지는 의미는 아마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사리사욕을 위한 성경읽기를 파면한다!”
새해 새마음으로 성경읽기를 도전하는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한다. 개인의 소원성취와 문제해결에 급급했던 지난날을 접고 진정 하나님을 알길 원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를 살길 원한다. 일상, 하나님나라!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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