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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서.
헤르만 헤세 저, '게르트루트'를 읽고.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모진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우린 이런 면에서 커다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올해 들어 세 번째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게르트루트'에서 난 또 다른 헤세의 자아와 그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소설 '게르트루트'는 '쿤'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음악가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다. 헤세는 이 소설 속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쿤'과 오페라 가수인 '무오트'로 분열하여, 자아의 스펙트럼 중 ‘예술가’라는 하나의 채널을 선택하여 증폭시킨다. 그러면서도 그 채널을 역으로 타고 프리즘을 거슬러 올라가 빛의 근원에 도달하려고 시도한다. 거기는 헤세 자신과 ‘수레바퀴 밑에’의 한스, ‘싯다르타’의 싯다르타, ‘데미안’의 싱클레어, 그리고 우리 모두의 거짓 없는 자아가 녹아 있는 곳이다.
이 책은 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을 회고하면서 시작된다. 뚜렷한 미래를 꿈꿔본 적이 없었지만, 어릴적 바이올린을 배웠고 음악의 즐거움을 알게 된 기억 덕분에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학교 진학을 결정한다. 비록 능동적이진 않았으나, 어쨌거나 음악가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음악이 좋아서 들어갔지만, 학교에서 요구되는 규칙과 규율과 의무에 부딪혀 그는 힘들어했다. 현실세계에서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해보니 그는 그저 자신이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만 했던 철부지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그는 실로 학습되지 않은 천재였다. 그의 안에선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는 그러한 자신을 깨닫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음악에 대한 회의를 느끼던 어느 겨울날, 그는 짝사랑했던 리디라는 소녀의 철없는 제안으로 가파른 언덕으로부터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다가 커다란 나무에 부딪혀 큰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그는 평생 다리를 절룩거리는 불구가 된다.
그런데 그 사고 덕분인지, 쿤은 음악에 대한 사랑과 동경, 그리고 그의 피에 흐르는 예술가적 기질에 집중하게 되고, 그로부터 기쁨과 위안을 얻게 된다. 음악만이 그에게 유일한 벗이자 휴식처가 된 것이었다. 복학한 뒤에도 그는 전에는 자신을 옥죄는 것으로만 느꼈던 학교 생활까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외적으로 불구가 되었으나, 내적으로는 성장하여 강해진 것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절름발이 인생의 시작이 그의 내면에 있던 예술가적 자아를 일깨우고 꺼집어내어 음악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음악가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것이었다.
재탄력을 얻은 그의 예술가적 기질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휴가기간 동안 자연과 함께 누린 철저한 고독과 침묵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는 자신의 첫 소나타와 가곡을 작곡하게 되는데, 학교 선생을 통하여 전혀 예상치 못했던 유명한 오페라 가수, 무오트에게 곡이 알려지고 인정까지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오트와의 만남은 쿤에게 있어 또 다른 낯선 세계로의 진입이었다.
첫 만남 이후, 무오트는 쿤에게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는 쿤의 곡들을 가장 먼저 사랑해 주었고, 무엇보다 그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가장 먼저 진심으로 인정해 주었다. 실로 무오트는 수면 아래 있던 쿤을 수면 위로 올려주는 다리였던 셈이다. 또한 무오트의 유명세는 무명인 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나중에 쿤은 곳곳에서 그가 작곡한 곡들이 연주될만큼 유명해지고, 신문에도 실리며, 전문가들로부터 좋은 평도 듣게 될만큼 성공한 음악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는 무오트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음악가의 인생도 사람의 인생인 법. 음악가의 인생에서 무오트는 쿤에게 정체성을 확립시켜주고 성공까지 가져다주는 다리가 되어 주었지만, 사람의 인생에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랑을 앗아가는 주범이 된다. 쿤은 자신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연인으로 지내자는 적극적인 제안까지 유일하게 했었던 여인, 게르트루트를 무오트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는 친구로 지내자는 게르트루트의 확고한 응답을 받은 불구자였고, 무오트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매력적인 목소리를 지닌 오페라 가수였다.
비록 무오트의 고질적인, 카사노바적이면서 사디스트적인 성향 때문에 고결했던 영혼의 소유자 게르트루트조차도 결혼 후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별거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게르트루트의 눈에선 더 이상 고결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쿤은 그들의 결혼 때문에 맘먹었던 자살 생각도 이겨내고, 그들의 별거로 인해 고통받는 게르트루트와 무오트와도 관계에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성숙한 인격을 보여준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와의 서먹했던 관계에서 왔던 영향도 이겨내며 쿤은 한층 더 성장하게 된다.
쿤이 열등감을 가진 헤세와 우리의 자아라면, 무오트는 오만함을 가진 헤세와 우리의 자아다. 책에서도 쿤은 게르트루트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친절과 사랑을 동정으로 생각하곤 하는 오류에 자주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열등감의 표출인 것이다. 반면, 무오트는 많은 것을 가졌으나 정작 내면의 안정을 찾지 못하여 늘 가학스러우리만큼 탐욕적인 사람으로 그려진다. 오만함의 병폐인 것이다. 책에서는 비록 오만함이 열등감을 이겨 게르트루트를 아내로 얻게 되지만, 그 승리는 오만함의 파멸로 이어진다. 게르트루트와의 별거로 인해 결국 무오트는 자살을 실행에 옮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열등감이 오만함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열등감과 오만함은 야누스의 두 얼굴과도 같다. 그 정체는 바로 교만, 둔갑의 귀재인 교만은 약자에게 가서는 열등감이 되고, 강자에게 가서는 오만함으로 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약자의 열등감과 강자의 오만함을 넘어설 때 우린 비로소 '진정성'과 마주한다. 열등감과 오만함은 우리 안에 자주 공존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것들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한다. '나'만 아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 그래서 나를 속이고 남도 속이는 죄악의 실체. 모든 폭력의 근원, 패망의 선봉, '교만'은 '진정성'의 대적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나'를 넘어 '남'에게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과정이라면, 험난할지라도 교만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게 되는 과정이 우리의 인생이라면,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충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적인 영역에 갇힌 자아가 공공성을 띠게 되는 모습에는 분명 희망이 있다. 공공성의 무게중심은 '내'가 아닌 '남'에 있으며, 그래야 '우리'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진정성과 함께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린 마침내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세는 무오트를 통해 오만함으로 표현된 교만에 막혀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 인간의 유형을, 쿤을 통해 열등감으로 표현된 교만을 이겨내어 자신을 넘어서 성장과 성숙을 이룬 인간의 유형을 보여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교만은 우리 안에서 언제나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분열한다. 그리고 마치 정반대로 보이는 두 축으로 둔갑하여 우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하나의 다리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사랑했던 소중한 사람 게르트루트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교만을 넘고 나를 넘어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오트가 아닌 쿤처럼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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