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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스를 죽였는가.
헤르만 헤세 저, ‘수레바퀴 밑에’를 읽고,
밤 9시가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혼내주기 위해 아버지는 오랜만에 분노의 회초리를 들었다. 그렇지만 같은 시간, 아들은 멀리서 이미 주검이 되어 차디찬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억압의 상징인 수레바퀴 밑에서 기어이 한스는 죽음을 맞이했다.
한스 기벤라트는 재능있는 아이였다. 시골 마을에서 유일하게 주 시험에 응시하여 차석으로 신학교에 입학하는 영예를 누릴만큼. 한스의 합격은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학교 교장의 명예였으며, 마을 목사의 자부심이었다. 한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그는 주위의 칭찬과 격려에 순응적이었다.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며 성공의 피라미드에 오르는 꿈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과도한 공부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일상을 빠른 출세를 위한 준비 과정과 맞바꾸는 그들의 친절한 손길에 그대로 순종했고 또한 증폭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선순환의 효과가 한 영혼의 파멸을 가져다 줄지는 그땐 아무도 몰랐다.
한스의 짧은 인생은 초창기에 터보 엔진을 장착한 로케트와 같았다. 가파르게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경쟁자 하나 없는 블루 오션을 누리기도 했다. 아주 총망받는 인재였다. 그러나 빨리 올라가면 빨리 내려오는 것일까. 한스의 표면적인 오르막길의 끝은 신학교 입학 후 첫 학기에 불쑥 찾아와 버렸다. 수도원 침실을 같이 사용하는 친구 헤르만 하일너를 만나고나서 부터였다.
헤르만 하일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체제에 비판적으로 저항하는 시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신학교에 들어올만큼 인재였지만, 학업에 매진하는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았으며, 한스 이외에는 친구도 없이 홀로 어둑한 연못 근처에 앉아 시를 읊거나 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체제의 부조리와 억압에 저항하는 반항아적인 그의 내면에 있던 불안한 정서는 급기야 그로 하여금 퇴학 처분을 받게 만든다. 그가 강제로 떠나게 되자, 유일하게 그와 함께 일탈을 일삼아 문제아로 낙인 찍혔으며 학업에서도 멀어질대로 멀어진 한스 역시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고 요양 차원에서 집으로 보내진다.
한스의 귀가는 한스에게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아버지의 망신이었고, 학교 교장의 명예 실추였으며, 마을 목사의 수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신사적이고 고급스럽게 그 감정들을 잘도 숨겼다. 그들 중 한스의 실패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으며, 곧 자살할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가득차게 되자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자살을 계획하면서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과 눈짓과 몸짓에 초연할 수 있었으며 묘한 환희까지 느꼈다. “두고 보라지. 다들 깜짝 놀랄 일이 생길테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비록 어린 시절 짝사랑했었던 소녀 에마와의 재회로 뒤늦게 찾아온 주체하지 못할 사랑의 충동을 느끼며 한스는 마치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에마는 말도 없이 고향으로 떠났다. 비록 어린 시절 평범한 아이들처럼 말썽부리며 뛰어놀던 장소에도 직접 가서 그때의 향수에 젖어도 보았지만, 그곳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만큼 자신이 커버렸다는 사실을 한스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실망을 숨기는 것이 마치 아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이자 사랑인 것처럼 여기는듯한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한스는 견습공으로서 일을 시작한다. “어찌 된 일이야? 네가 철물공이 된거니?”, “주 시험에 합격한 기계공이군!”과도 같은 조롱에도 별 대꾸하지 않을 각오가 된 것이었다. 이미 한스는 자살 충동에 흥분하는 시기를 지나 몽롱한 나른함과 나태함으로 이루어진 체념의 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듯한 기분도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무 빨리 늙어버린 탓이었다.
나중에 저자 헤르만 헤세의 연보를 보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스와 하일너는 각각 헤세의 분열된 자아다. 헤세 역시 어릴 적 인재였고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쫓겨났다. 견습공으로서도 일해보았다. 아버지와의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즉, 헤세는 자신의 실제 내면 세계를 기반으로 삼아 창작과정을 추가하여 이 소설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책이 헤세의 자서전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책을 덮자 마음이 무거웠다. 이미 중학생 시절에 한 번 읽었기 때문에 한스의 죽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난 끝까지 그의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다. 특히나 그의 죽음의 상세한 과정과 설명이 책에 부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나의 허무함이 배로 커져버렸었다. 한스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믿는 유일한 구두장이 플라이크 빼고는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버지도, 학교 교장도, 그리고 마을 목사도. 아무도.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건 그들이야말로 수레바퀴를 돌리는 장본인이었다는 점이다. 한 어린 영혼을 처참하게 파멸로 이끈 수레바퀴를 그들은 그들의 공명심으로 성실하게 돌려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스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죽음으로 응답해야 할만큼 말이다.
이 책은 헤세의 자서전을 읽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헤세의 목적은 분명 거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어떻게 하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가 헌신하며 도왔다고 생각하면서, 한 어린 영혼을 공식적이고 효과적으로 파멸시킬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지름길을 제시하며 거기에 강렬한 비판을 가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미 고고하게 확립된 체제와 규범, 그 배후에 숨어서 실리를 취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본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실하게 지속해서 돌려야만 하는 수레바퀴. 그렇다. 수레바퀴는 겉으로는 건실하게 보이는 사악하게 획일적인 프레임의 중추다. 그것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프레임에 순응적이지 않은, 즉 창의적으로 탁월하거나 아니면 부족하고 약한 이들을 규격화시키는 힘이다. 한스는 그 수레바퀴로 만들어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개성이 넘치며 제각기 다른 영혼들이다. 결코 획일화될 수 없는 존재다. 공장의 규격화된 부속품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의 교육 제도를 포함한 수많은 체제와 규범들을 보면 공장과 다름 아니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가 잠정적인 프로크루스테스일지도 모른다. 한때 스스로는 그 프레임에 저항했으나 결국 순응해버렸고 이젠 남들까지도 자로 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각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소통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아름다움은 세상에선 그저 비효율적인 잡음에 불과하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수레바퀴는 그렇게 우리들로부터 인간다움과 낭만을 앗아갔다.
죽은 한스를 생각한다. 그는 바로 우리일 수도 있고, 후대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자녀일 수도 있단 말이다. 떠밀리며 사는 삶엔 소망이 없다.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시대에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난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끽끽대는 기계소리를 거부한다. 두 번째의 한스가 나오지 않도록 우리가 나서야 할 차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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