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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대학원생처럼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연구에 매진하며 살았다. 새로운 발견도 했고, 성취감에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10여년 전과 같지 않은 체력을 탓하기도 하며, 꽤 많은 시간을 연구에 투자했다. 덕분에 일이 빠르게 진행이 되었고, 내 능력이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에 우쭐해지기까지 했다. 내년이면 실험실 연구비 부족 문제로, 본의 아니게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물 수 없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고 있어서, 내가 진행해오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멋지게 마무리지으려는 마음도 크게 한몫 했다.
퇴근할 즈음이었다. 빛의 잔상이 오래 남은 것처럼 사물을 보는 초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점심을 굶어서인지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연신 하품을 해대며 토할 것처럼 메쓰꺼웠다. 어지럽기도 했다. 그리고 난 갑자기 번개를 맞은 것처럼 클리블랜드에서의 편두통 시절이 오버랩되어 벌컥 겁이 났다. 생각해보니, 딱 이랬었다. 일, 일, 일... 진행되는 업적은 내 건강과는 무관했다. 덕분에 그 이후로 혈압약을 복용하게 됐다.
아내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집에 오자마자 화장실에 다녀온 후,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진통제를 먹은 후, 깨질 듯한 머리를 감싸안고 침대에 누웠다. 다행히 곧장 잠이 들었나보다. 눈을 뜨니 세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자정 무렵. 아내와 아들은 벌써 잠자리에 들었고 나만 홀로 깨어있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의 무식함과 무모함을. 후회한다. 굳이 그렇게 막 달릴 필요가 있었나... 앞차 하나 추월한다고 해서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난 이십대의 젊은 청년도 아닌데 말이다.
책 읽기와 글 쓰기 시간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단 30분이라도 사수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내게 있어 그것은 여유가 아니라, 생명유지장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새 고독과 침묵 속에서 글을 읽고 쓰며 묵상하는 것은 나와 한 몸이 되어 있었나보다. 그것을 한동안 무시하려고 했더니, 이렇게 몸이 탈이 나는 거다. 싸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싸인을 엄숙한 경고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침 내일은 아내가 오프다. 탁 트인 바다나 가봐야겠다. 아. 난 정말 행복한 놈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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