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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서서.
J. D. 샐린저 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책 제목의 의미를 처음으로 눈치챌 수 있는 장면은, 주인공 ‘홀든’이 여동생 ‘피비’에게 선물할 레코드 음반을 사기 위해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걸어가고 있을 무렵 들려온 한 꼬마의 노래에서다. 그 꼬마는 “호밀밭을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을 부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지나가는 차들의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관통했고, 그 꼬마 부모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홀든의 귀까지 전달되었다.
그리고 부모님 몰래 잠입한 자기 집에서 피비를 깨워 얘기를 나누던 중, 좋아하는 한 가지만 말해보라는 피비의 질문에 홀든이 머뭇거리다가 답한 장면에서 비로소 그 뜻은 명확해진다. 다분히 문학적이고 순수하며 이상적인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홀든은 이미 여러 차례 퇴학이나 자퇴로 고등학교를 그만 둔 이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펜시’라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이번에도 퇴학을 당했다. 이 책은 퇴학이 결정된 후, 아직 부모에게 공식적으로 통보되기 전의 며칠 간, 홀든이 학교를 먼저 떠나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방황 기간을 주로 다룬다. 홀든은 부모님이 공식적인 퇴학 통보를 받기 전, 그러니까 방학이 시작되기 전 집으로 들어간다면 받게 될 뻔한 의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홀든은 학교를 떠나 집이 있는 뉴욕으로 향한다. 호텔에서 머물며 그 시대 어른들이 하던 위선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에 그대로 노출된다. 이미 직간접적으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아직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홀든은 어른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대우받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어른처럼 술을 시켜서 먹고 싶고, 담배도 당당하게 피고 싶고, 여자와 섹스도 하고 싶어하는, 즉 고등학생이면 의례히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될 욕구를 충족하길 원했던 것이다.
책을 읽어보면 홀든이 원하는대로 거의 이뤄지지도 않았지만, 홀든이 보여주는 행동과 말들, 그 안에 흐르는 그의 생각의 흐름과 감정의 변화,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여 보여지고 들려오는 어른들의 행동과 말들을 보며, 난 지금도 거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저자인 샐린저가 하필이면 평범하지 않은 한 고등학생의 눈으로 그 당시 미국 사회 (이 책의 출판은 1951년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를 바라보며, 때론 직설적이고 때론 냉소적인 표현을 동원하여 미국을 그려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미국이 아닌 모든 기성세대에게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가식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제목에 힌트가 있다고 본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중간인,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으며, 어른들의 세계가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답습하려는 생존본능과 그것에 저항하려는 욕구 사이에 놓인 강을 아직 건너지 않은 한 청소년의 눈에 비쳐진 세계를 통해 샐린저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인 것이다. 이미 정립된 기성세대의 관점으로 봤을 땐 바보 같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홀든은 기꺼이 사랑스런 여동생 피비와 같은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한다. 호밀밭은 낭떠러지와 닿아 있다. 그 낭떠러지는 아마도 기성세대가 정립한, 마치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이나 퇴폐적인 술집과 호텔 같은, 세상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마구 뛰어놀기만 할 뿐, 그 어린아이의 세계가 낭떠러지와도 같은 어른들의 세계와 맞닿아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중간인으로 나오는 주인공 홀든은 그 경계를 알고 있다. 강을 건너려고 시도도 해봤다 (홀든이 퇴학생으로 그려진 숨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홀든의 고백으로 보아선, 여느 청소년들이 가는 그 길을 가지 않고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남는 위대한 결단을 나중에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공부도 잘 하고 잘난 학생들의 눈에는 자기애와 욕심에 눈이 멀어, 낭떠러지라는 실체가 그저 살아남고 밟고 일어서기 위하여 계속해서 올라가야 할 피라미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아주 평범하다고도 볼 수 있는 홀든의 눈에는, 오히려 두 세계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였고, 아이들의 세계가 가진 가치가 훨씬 더 소중하게 여겨진 것이다. 인생을 바쳐 보호하고 싶을만큼.
나도 한 때 피비처럼 아이였고, 홀든처럼 중간인이었으며, 이젠 그 시기를 훌쩍 뛰어넘어 기성세대가 되었고, 피비와도 같은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일개 범인이다. 홀든과는 달리 난 경제적 배경이 전무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지만, 이렇다할 큰 어려움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물론 홀든을 통한 저자 샐린저의 관점이 녹아있는 책이겠지만, 난 홀든의 나이일 때 홀든이 했던 고민과 생각들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홀든보다 공부는 잘했을지 몰라도 세상과 사회에 대한, 기성세대에 대한 부조리와 위선에 대해서는 그리 큰 의문을 가져보지도 않았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다가온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사적인 복음만을 강조했고, 이는 나의 내면의 평안과 생존과 번영만을 위한 삶을 살게 만들었다. 공의롭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며 평안과 평화를 도모하는 세상이 허공에 뜬 이론이 되지 않기 위해선, 현재 내가 처한 좌표를 가능한 객관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고 적실하게 말이다. 이런 면에서 홀든은 나보다 훨신 나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미국 나이로 마흔 하나가 되어버린 나. 전체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아온 나. 몇 년 전에서야 홀든이 가졌던 생각들을 하게 되었던 나.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전진한다. 의로운 세상을 위한 삶을 살기를 도전한다. 꺼져가는 등불이나 상한 갈대와도 같은 자이지만, 결코 꺼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라는 소망을 가지고서. 모두가 평등하고 존중받는 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바로 이런 세상이 샐린저가 홀든을 통해 꿈꿨던 세상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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