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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같을 경우, 그리고 그 일이 직업일 경우, 우린 그 상황을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에겐 이러한 논리가 아직까지 하나의 견고한 지침일 될 정도로, 또 누군가에겐 그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면 죄책감을 느끼고 자학을 해야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강하게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는 논리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언젠가부터 이러한 질문에 봉착할 때마다 괴리감을 느낀다. 이 기분은 그저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자의 실패감이나 열등감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평생 구속되어 있다가 끝내 얻은 자유에 대해 어색해하는 단순한 관성에 의한 미숙함일까.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까.
가치관의 변화를 겪는 과정에 정답은 없다. 가치관이란 자체가 주관적인 관점이기도 하지만, 그 변화의 정당성과 도덕성, 그리고 가치 등 모두 누군가로부터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것들에서부터 떠난 후, 원래 있던 자리를 좋지 않게 평가해야 할 경우, 마치 두 세계 사이의 높낮이가 생겨버린 것 같은 경우, 두 세계 사이의 긴장과 대립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고, 마치 차를 타면 멀미를 하듯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주위를 맴돈다. 차를 타지 않을 수 없듯 우린 그 기분을 평생 느끼지 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면 잘할 거라는 말은 잘하는 것을 좋아해야만 할 것 같은, 일종의 강박적인 힘을 행사한다. 결국 어떤 일을 잘한다는 것은 다분히 다수의 타자의 관점에서 공히 인정받아야 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기에, 이 폭력은 한 사람의 순수한 마음을 충분히 흙탕물로 휘저어놓기에 충분하다. 언젠간 폭로되겠지만, 그땐 이미 많은 상처를 받은 이후여야만 한다는 전제가 따라 붙는다. 그러나 그 상처는 과연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면 우린 그저 또 한 번 속았던 것일까.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참 좋겠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반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은 잘하는 일로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며 하소연을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잘하는 일을 좋아하려고 노력하며, 좋아하는 일을 잘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이 간극은 과연 메워질 수 있을까. 직업이란 정말 좋아하며 잘하는 일이어야만 하는 걸까.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그리고 자신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직업. 이 세 가지에 독립성을 부여하면 어떨까. 우린 이미 어떤 암묵적인 힘에 의하여 이것들을 통합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 통합에 실패한다. 각자가 나름대로의 변명이 있고, 거기서부터 오는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합리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은밀한 죄책과도 같은, 그 더러운 기분은 죽지도 않고 자꾸만 우리를 괴롭힌다. 변명과 합리화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던가.
소명과 사명이 개인의 취향이나 능력, 그리고 돈 버는 방법에 제한되는가. 이상적인 내적 평화는 이 세 가지 것들의 통합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누가 이 통합을 우리에게 명령했던가. 평생을 이런 돌고 도는 무한루프의 질문 속에서 이따금씩 아파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할 건 혹시 '정체성'이란 단어가 아닐까. 사적인 수준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공동체 단위에게 주어진 이 개념, 정체성. 여기에서 우리들은 자신의 사명과 소명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기본이라 믿고 제쳐두었던 그 개념. 정체성이란 이름의 옛 사진 위의 먼지를 털어버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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