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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습관을 지배하는 자.


제임스 K. A. 스미스 저, '습관이 영성이다 (원제: You are what you love)'를 읽고.


살아가면서 아주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관통하는 커다란 축복 같은 깨달음도 언제나 말초에 있는 손과 발까지 그 힘이 전달되지는 않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머리와 가슴을 통과한 대부분의 뜨거운 피는 손과 발까지 다다르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 운명을 맞이한다 (기억하라, 작심삼일. 우리의 오래된 벗 아닌가). 머리를 먼저 강타한 지성도, 가슴을 먼저 울린 커다란 감성도 모두 체내에서 흡수되지 못한 채 배설물로 폐기처분 되는 현상. 이 비극적인 악순환이 혹시 우리들 일상의 (혹은 영성의) 현주소는 아닐까.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새로이 깨닫고, 나아가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던 대상과 방식의 그릇됨을 반성하며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해도,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읽는 것과 번역하는 것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읽는 것이 지식을 습득하고 깨닫는 과정이라면, 번역하는 것은 그것을 직접 삶에서 살아내는 과정이다. 몸 안에 들어온 영양분을 세포에서 흡수하고 에너지로 전환시켜 건강한 몸을 유지하듯, 읽어서 들인 지식이나 깨달음을 행동으로 번역하여 다시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화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화만 해서는 우리의 몸과 우리의 삶은 현재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현상 유지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적인 변화를 주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 시기에는 앎과 행함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혼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변화 있는 삶을 원한다면 소화과정을 넘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체화과정'이다 ('성육신'이라고도 읽어보자. ‘습관’이라고도 읽어보자). 삶의 변화는 우리가 읽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해하고 깨닫고, 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생각하고 계획한대로 살지 못하고 (비록 그렇게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자동적으로 몸에 익은 방식대로, 즉 관성대로 살아가는 존재다. 이런 특성을 가진 우리가 무언가를 삶에서 새로이 살아낸다는 것은 반드시 '습관화'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습관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행위는 아무리 그것이 의미심장하더라도 '일회성의 좋은 시도', 또는 '보기 좋은 쇼' 정도의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거기에 지속은 없다. 변화도 없다. 관성에 철저하게 지배 받는, 다시 말해 무의식과 본능에 의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생각건대, 이러한 삶은 아마도 인간이란 존재에게 주어진 삶은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에겐 관성을 넘어서는 힘이 가능하다. 비로소 변화를 가져오는 힘, 혁신의 힘. 그 힘은 관성을 넘어서는 관성, 제 2의 천성, 곧 습관이다. 그러므로 머리 끝부터 시작하여 가슴을 거쳐 손과 발까지 몸 전체에 따뜻한 피가 흘러, 쫓기거나 죽은 것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리드하고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특권은, 다시 말해 ‘기계적 일상’이 아닌 '창조적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특권은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닌 '습관을 지배하는 자'의 손에 있을지도 모른다. 습관은 지성과 감성보다 강한 법이다. 


습관의 힘을 재조명하여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기독교의 영성과 연관시킨 책이 있다. 바로 이 책,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제목의 책이다.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와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의 저자, 제임스 K. A. 스미스의 신작이다. 전작의 제목에서 보이는 '욕망'과 '상상'이라는 단어, 그리고 이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습관'이라는 단어에서 저자의 생각과 주장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 저자는 머리와 가슴이 아닌 손과 발, 그것도 사용해야겠다고 의도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움직여질 정도로 몸에 익은 손과 발이야말로 우리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단순한 지성으로 환원하는 근대의 주지주의적 인간 모형을 한 문장으로 잘 나타내는  "You are what you think (당신이 생각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를 부인한다. 대신 "You are what you love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욕망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우리의 지성이 아닌 우리의 바람과 갈망과 욕망이 우리 정체성의 핵심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우린 생각하고 계획한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원하고 욕망하는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인간이란 무언가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면서, 기독교의 ‘제자도는 우리 마음을 정렬하는 방식,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거기에 주목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따끔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는 제자도를 일차적으로 교훈에 관한 문제로 - 마치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대체로 지적 활동, 지식 습득의 문제인 것처럼 –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은 정보로 우리 지성만 채우시지 않고 우리 사랑을 빚으시는 선생’이라는 것이다. 즉, 기독교와 성경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배우고 알고 깨닫고, 과거에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반성과 회개로 통곡을 할지라도, 실제로 하나님나라를 바로 이 땅,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세계에서 살아내기 위해선 반드시 습관이라는 대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가나안에 진입한 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의 끝이 아니라, 거기에 이미 상주하고 있던 잘못된 습관과도 같은 거짓신들과 우상을 제거해야 하는 작업이 남아 있었던 것고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 책은 총 일곱 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간이 없다면 첫 장만이라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첫 장이 나머지 부분의 전제이자 총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난 첫 장을 읽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나 역시 지성과 감성의 새로운 유입을 추종하는 무리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을 다 읽고 통쾌한 느낌과 함께 뒤끝이 찝찝했던 이유는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나 역시 머리와 가슴이 손과 발과 따로 노는, 다분히 이중적인 삶을 현실에서 괴리감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조금은 위로가 되어주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것이 올바른 것은 아니기에 나는 이 책에서 찔림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자신이 알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전적인 확신에 가득 차 다양성을 배제한 채 지성과 감성의 꼰대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돌이켜 낮은 자세로 눈과 귀를 열고 새로운 것들과 다양한 해석들을 접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충분히 칭찬할 만한 일이겠지만, 거기에서 오는 무너짐과 새로 세워짐의 희열에 만족하고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머리와 가슴만 뜨거워진 채 가만히 앉아서 유레카를 외치거나 눈물을 흘리고 마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개인뿐 아니라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 가정 및 세상에서의 예배 방식에서 역시나 무시되어왔던 습관의 힘, 즉 예전의 힘을 상기시키고 부각시키는 내용으로 충실하다. 저자는 책에서 직접 “이 책이 사랑의 예전적 형성에 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촉매제가 되길 바란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날마다 반복하는 의례를 문화적 실천으로, 즉 예전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하며, 죄 또한 개별적인 잘못된 행동과 나쁜 선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악덕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덕은 도덕적 습관이기에 죄는 관성의 영향 아래 놓여있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 이상의 것, 곧 습관 바꾸기가 필요하고 우리의 사랑을 재형성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외친다. 또한 현대의 복음주의 예배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 종교개혁의 원인이었던, 각본에 따라 이뤄지는 자연주의와 예배자를 구경꾼으로 만드는 수동성을 흉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모름지기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지향을 재조정하시고 우리 욕망을 재형성하시고 우리 사랑의 습관을 바로잡으시는 무대라고 역설한다. 예배의 핵심은 ‘지성’이 아닌 ‘형성’이라는 것이다. 형식을 껍데기와 같이 하찮은 것이라고 배워온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주장이 처음엔 불경스럽게 느껴질지 몰라도, 책 초반부에 나온 인간의 본질을 묵상하고 습관의 힘을 깨달았다면,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보면 예배의 형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저자가 간파한대로, 설득당하기보다는 감동받는 존재인 미적 피조물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예배가 이루어진 결과 탈육신 과정이 발생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예배의 핵심인 양, 마치 그런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인 양 여긴 결과 우리가 맞이한 기독교 신앙은 몸과 분리되어 (탈육신) 메시지로 요약되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사안으로 변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저자는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독교의 형태는 바로 (예전을 통하여) 재주술화된 기독교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앎과 행함 사이의 괴리감은 개인 영성과 공적 영성 사이의 괴리감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이 안다고 해서 안 만큼 많이 행하지 않듯, 24시간 하나님만 바라보며 개인 영성을 고양시킨다고 해서 결코 그것이 공적 영성으로 발전하진 않는다. 물론 많이 알려고 하는 노력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듯, 홀로 하나님을 독대하며 회개와 성찰을 하고 내면의 치유와 정함을 얻는 시간은 기독교 영성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지점에서 멈추고 자족하며 그것이 전부인 양 착각하는 신앙이다. 나는 복음의 공공성이 복음의 본질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개인 영성에 그치는 신앙은 원죄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자기애와 교만이 그 안에 숨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앎과 행함 사이에는 습관이라는 단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개인 영성과 공적 영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형태는 분명 예배라고 믿는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공동체와 함께 하는 예배. 개인 영성만을 고집하는 잘못된 습관을 바꾸는 유일한 공간.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며 뜨거워진 가슴으로 일상에서 작은 하나님나라를 살아낼 수 있도록 훈련받는 장소. 참 제자도를 실현하는 장소. 어쩌면 이것이 모든 가나안 성도와 세속성자들이 욕망하는 교회의 예배가 아닐까. 나도 다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지 않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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