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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공동체, 곧 사랑의 공동체.
제럴드 싯처 저, '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읽고.
그는 지금도 사고 직후의 순간을 슬로모션처럼 기억하고 있다. 어두워진 시각, 가족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였다. 맞은 편에선 차량 한대가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커브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중앙선을 넘어 그가 운전하던 밴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는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마 영혼에 새겨졌을 정도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충돌 직후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네 살 난 딸과 어머니의 몸은 구부러져 있었다. 의식은 없었다. 즉사였다. 의식이 남아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찌그러진 창문을 통해 아이들을 데리고 차에서 빠져 나왔다. 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상실의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이 책이 쓰여진 직접적인 배경이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상처의 치유는 시간이 지났을 때 자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혹은 마치 남의 일을 쉽게 이야기하듯, 감쪽같이 잊어버리게 되는 거라고. 그때가 바로 완벽한 치유가 일어난 시기라고.
마음의 상처는 보통 상실과 고통에 기인한다. 상처가 길면 길수록, 또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은 우리 내면세계에서 트라우마로 자리잡고 우리를 깊은 상실과 고통에 길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길들여짐은 우리를 비가역적으로 바꿔 놓는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곁에서 늘 함께 하던 사랑하는 사람이 눈 깜짝할 순간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단 1초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일상을 당연하다는 듯 함께 하던 사람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찌 우리의 남은 삶이 그 죽음 이전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는 상실과 고통이 오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게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치유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실과 고통을 가슴에 안고 아파하고 견뎌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과정 전체다. 치유는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끝이 없을지도 모르는.
또한 치유는 과거의 기억을 삭제하는 작업이 아니다. 중요한 건 현재다. 먼 미래에는 그 현재가 치유의 한 순간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흔히 사람들은 치유를 받아야 현재를 잘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현재를 잘 살아내는 것이 치유를 받아가는 것이다. 치유가 맺고 끊음이 분명한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기에, 상실과 고통으로 인한 아픔과 슬픔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우리들의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인생은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받고 또 치유 받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 제럴드 싯처에게 찾아온 날벼락 같은 상실은 그와 살아남은 그 가족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남겼다. 그에게 닥쳤던 그 상황에 우리 자신을 대입해본다면, 공감을 훨씬 넘어선, 가슴 먹먹한 그 무언가에 가슴이 저민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당한 엄청난 상실과 고통,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굴복하지 않았다. 상실 후 수많은 불경한 생각과 의심, 분노, 원망, 좌절 등의 극심한 고통의 단계를 지나오며, 그 모든 과정 중에 계셨던, 마치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던 하나님에 대한 더 큰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상처에 굴복하지 않고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굴복하기로 선택했던 것이었다.
그는 맞은 편 차량의 운전자를 복수하고 싶은 마음, 그 사람을 그리고 그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도 넘어섰다. 그 상실로 인해 불쑥 와버린 모든 낯선 상황을 수많은 환멸과 증오의 기로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하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상실의 이전과 이후는 극명하게 달랐다. 완전한 치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책의 마지막에서도 여전히 자신은 상실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고, 그 상실에서 회복되지도 않았다고 고백한다. 여전히 아직도 자신의 삶이 지금과 달랐으면 하는 바람과, 아내와 딸과 어머니가 살아 있다면 하는 바람을 품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변화했고 또 성장했다." 그리고 그는 상실 자체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도 예상할 수도 없지만, 상실이 왔을 때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는 전적으로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우리가 받는 은혜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다.
상실을 당했을 때 흔히들 하는 첫 반응은 무시와 회피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상실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려는 마음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오히려 일부러 더 바쁜 일상을 만들어 상실로 인한 고통과 슬픔이 자신을 찾아오지 못하도록 엄연히 존재하는 상실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건강하지 않은 방법일뿐더러, 오래 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시하면 할수록 도망치면 칠수록 상실은 눈덩이처럼 더 커진 고통과 슬픔을 불러올 뿐이다. 저자는 여간 해선 겪기 힘든 커다란 상실을 당한 유경험자로서 상실과 고통에서 어떤 의미를 얻을 수 있는지,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본인의 깊은 슬픔에서 길어올린 지혜의 우물을 우리에게 내민다.
읽는 내내 가슴이 미어졌다. 어느 부분은 구구절절 마음이 요동쳐서 더 읽고 싶지 않았다. 저자는 파도가 지나간 뒤의 잔잔한 물결처럼 담담한 어투로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에서 내 가슴은 더 저미었다. 그러나 저자에게 참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상실과 고통에 대한,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 깊은 성찰 덕분에 나 자신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많은 상실과 고통 속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인이 치유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가 공동체였다고 고백한다. '상처 입은 공동체'. 곧 사랑의 공동체. 모두 상실과 고통을 겪고 아파해보았던 사람들. 충분히 인생을 파괴할 만한 힘을 가진 그 상실과 고통의 잠재력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들.
나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가. 혹시 늘 상처 받고 아파하며 누군가의 도움만을 받길 바라는 어린애로 여전히 머물고 있진 않는가. 나도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어찌 남을 도울 수 있겠냐고 합리화 아닌 합리화를 해대며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기는 커녕 조소와 악한 통쾌함을 가슴 속에 숨기고 있진 않는가. 치유가 인생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또 다른 상처도 더해질 수 있다는 우리네 무작위적인 인생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가슴을 울리도록 보여줄 수 있는 건 바로 '상처 입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상실과 고통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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