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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묵념.
한강 저,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작가 한강은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 그녀가 여전히 국민학생이었던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선 전두환의 지휘 하에 수많은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다. 5.18 민주화 운동, 광주항쟁이라고도 불리는 사태다. 한국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도 잊혀지지도 않을, 치명적이고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보다 30년 전에 벌어졌던 6.25 한국전쟁 역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적어도 그땐 민간인들을 학살할 목적으로 나라가 군을 동원하여 탱크를 앞세우고 총검을 휘두르진 않았다. 그러나, 믿을 수 없지만, 1980년 5월 18일은 그랬다. 군의 일방적인 살육 행위였다. 불의와 폭력과 탐욕이 인간을 지배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빼앗았으며, 약자들의 몸을 한낱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고, 인간 위에 마치 또 다른 인간이 있는 것마냥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가진 존엄성을 가차없이 폐기시킨 사건이었다. 실로 악의 발현이었다.
비록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광주에서 태어나 지금은 어느덧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작가 한강. 어릴 적부터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녀가 이 묵직하고도 비장한 침묵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광주학살을 전면적으로 다루며 책을 쓰게 된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학살의 희생자, 그 중에서도 ‘동호’란 이름을 가진, 당시 중학생이었던 한 작은 영혼을 매개로 하여, 그때 그곳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실상과 그 이후 30년이 넘도록, 아니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깊게 각인된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실상에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실제 인물과 일대일로 대응하진 않지만, 실존했던 인물과 실제 벌어졌던 일이 작가의 상상력의 옷을 입고 깨어나 이 책이 되었다.
'소년이 온다'는 에필로그까지 합쳐서 총 일곱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화자와 주요 등장인물이 다르다. ‘채식주의자’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선보인 바 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장의 화자는 5.18 광주학살 현장에 있었다는 커다란 공통분모를 가진다. 그리고 모두 동호와 연결되어 있다. 아마 작가는 한 사람의 눈으로 감히 학살 희생자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아픔을 표현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어쩌면 무례하기조차 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지만, 비록 소설이지만, 가능한 허구적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도 살아있는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작가는 일부러 여러 사람의 눈을 통해 그 사건을 다룬 게 아니었을까.
작가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동호라는 소년을 입구 삼아 우리를 1980년 광주로 인도한다. 동호는 이미 단짝이던 친구 정대를 잃었다. 어느 날 들이닥친 계엄군의 무자비하고 일방적인 폭력에 희생되었다. 동호는 정대의 죽음을 목격했다. 함께 손잡고 도망가다가 정대는 총을 맞고 길거리에 쓰러졌다. 동호는 그 손을 놓고 조금 더 도망가서 목숨을 구했다. 운 좋게 총알은 동호를 빗겨갔다. 하지만 동호는 길가에 숨어 정대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중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사건이었다.
살아남은 동호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였을까. 동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이미 주검이 된 희생자들의 시신을 모으고 유가족을 연결시켜주고 합동분향소와 추도식을 준비하는 도청을 자발적으로 찾는다. 이 책의 첫 장은 동호가 도청에서 자발적인 도우미로 참여하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추도식에서는 애국가가 제창되고 관은 태극기로 감싸여진다. 동호는 묻는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유가족들은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그렇다. 그것은 명백한 살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가 죽인 것이었다. 나라가 민간인을, 나라가 학생들을, 나라가 친구 정대를 죽인 것이었다. 동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쳐들어온 계엄군의 총칼에 동호 역시 죽음을 맞이했지만, 동호는 아마도 끝내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진 못했을 것이다.
2장에서의 화자는 정대의 혼이 되어 살육 당한 주검들이 트럭에 실린 채 어느 산으로 고깃덩어리처럼 운반되어 일괄 매장되는, 비인간적인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 난 사실 숨 쉬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하루를 다른 책을 읽으며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아픔의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이 부분을 떠올리면 마음이 힘들다.
동호와 정대, 그리고 정대의 누나 정미는 학살 현장에서 죽었지만, 동호와 함께 도청에서 도우미로 일했던 은숙, 진수, 선주, 그리고 동호의 엄마는 살아남았다. 3장부터 6장까지는 살아남은 그들의 지속된 슬픔과 아픔을 각자의 눈과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5.18이 지난 5년 후, 출판사에서 박봉을 받고 일하던 어느 날 형사에게 끌려가 취조 당하며 뺨을 일곱 대 맞는 은숙의 현재와 과거 이야기가 3장을 이룬다. 4장은 5.18 10년 후의 이야기다. 진수와 함께 감옥 살이 하던 교대 복학생 남자를 통해 계엄군이 쳐들어와 살육하던 5.18 당시 현장과, 살아남았지만 빨갱이라는 딱지를 띠고 진수와 함께 감옥에 잡혀 들어와 가혹한 고문을 받았던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한 후유증을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그는 심지어 살아있다는 것이 치욕이라 느꼈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지독한 후유증은 그를 늘 현실에서 동떨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5장은 5.18이 지난 20년 후를 다룬다. 5.18 현장에 대한 증언을 해달라고 부탁을 받은 선주 내면의 이야기다. 그녀는 서울에서 시위하다가 어느 사복형사에게 배를 밟히고 옆구리를 차여 탈장된 채 응급실에 실려가 목숨을 건졌다. 경찰에 연행된 후 하혈이 멈추지 않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다. 그 후 그녀는 노조 운동에 앞장섰던 성희 언니와 다른 길을 택하여 한 발 멀리 떨어져 다소 안전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죄책감에 힘들어 한다. 6장은 사투리로 도배되어 있는 가장 짧은 글인데, 2장 만큼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살아남아 직접 손으로 아들을 묻은 동호 엄마의 독백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아픔을 말할 때 작가가 어머니의 입을 빌린 선택은 정말이지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고 명징한 방법이었다. 마지막 7장 격인 에필로그에서는 마치 한강 작가가 화자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와 배경을 보여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호는 이 작가가 서울로 이사오기 전 광주에서 살던 집으로 이사를 들어온 집의 아들이었다.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읽는 내내 힘들었다. 긴장과 집중과 몰입이 자연스레 되었고, 한 장을 읽고 나면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덕분에 한꺼번에 하루에 한 장 이상 읽지를 못했다. 이 책이 총 일곱 장이니까 일주일이 꼬박 걸린 셈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한강 작가의 섬세하고 정확한 표현력과 필력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읽으면서 참 아픈 소설이었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 잔인했을 거란 생각을 하면 몸이 떨릴 만큼 두렵고 끔찍하다. 나 역시 어릴 적 '살인마 전두환'이란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한 번도 제대로 5.18에 대한 글은 읽어보지도 못했다. 내겐 그저 타인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이 책 덕분에 난 비로소 그들과 같은 국민이 되었다. 이제서야 그 희생자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더 진지하게 기리며 묵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의 뒤늦은 묵념을 사죄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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