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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향한 눈.
세상의 모든 상실과 고통은 맞닿아있는 것일까. 작은 상실과 큰 상실은, 제럴드 싯처가 간파했듯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상실이 있고 없고가 있을 뿐이다. 진정으로 그 상실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경험했다면, 함부로 말 못할 그 먹먹한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기억에서 많이 잊혀졌던 그 순간이 어느 날 불현듯 되살아나 살아온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직면하며 처절한 무기력함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상실은 회상되어질 때마다 우리를 번쩍 들어 원점으로 데려다놓는다. 상실의 기억은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한다. 그것은 더욱 힘이 세다.
큰 상실을 겪고 그것이 마치 훈장이라도 되는 것마냥 거만해진 사람을 본다. 이 자의 눈에 비친 왠만한 타인의 상실은 상실이 아니다. 자기가 겪은 상실에 비하면 함량 미달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 정도의 상실이라면 아파할 자격도 없다는 것처럼. 이 자는 언젠가부터 사람을 볼 때마다 자신의 주관적인 자로 재고 있다. 누가 더 큰 상실을 당했는가,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잣대로. 그러나 난 이것을 감히 배제와 혐오의 또 다른 얼굴이라 읽는다.
상실을 겪고도, 지독한 고통을 당하고도, 인간은 여전히 교만할 수 있다. 상실과 고통을 겪고도 타인을 향한 공감과 사랑, 존중과 배려의 열매를 따먹지 않는다면, 과연 그 상실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지만 이런 논리도 광주학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보기좋게 빗나간다는 것을 난 ‘소년이 온다’를 읽고 인정해야만 했다. 인간의 인내에는 임계점이 있고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라도 그 고통을 당했다면 임계점을 가뿐히 넘어서는 상실이 있기도 한 것이다.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상실의 구렁텅이. 그 깊은 늪. 그들도 물론 회복되어 타인을 향한 공감과 사랑으로 자신의 상실과 고통을 승화시키면 참 좋겠지만, 나 같아도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나 자신의 일상도 모두 그때의 상실과 고통으로 흠뻑 물들어버렸는데 어찌 타인을 향해 눈을 들어 관심을 내비칠 수 있겠는가. 이미 그렇게 살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있는 힘을 다 쥐어짜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상실을 비교할 수 없다는 이론은 이해가 되고 그게 맞는 것 같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법칙처럼 적용하고 그 관점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분명 잘못이다. 일반적인 이론을 특수한 경우에 적용하는 경우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우린 알아야 한다. 대신 우리가 그들을 공감하고 사랑을 베풀면 되는 것이다. 주고받는 관계,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주기만 할 때가 있고 받기만 할 때도 있다. 약한 사람과 상처가 깊은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너무 많이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한 계속 받아도 채워지지 않을 만큼. 이렇게 한 가지를 또 배운다. 책을 읽고 일상을 읽으며 얻어가는 것은 타인을 향한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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