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monologue

동지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3. 9. 02:28

동지.


익숙함을 낯설게 대하며 숨겨졌던 의미를 발견해가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낯섦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새로움 가운데 깃든 익숙함을 발견해가는 재미 역시 대상을 보다 온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 동안 도전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높이와 깊이를 더하기 위한 방편 정도로만 생각해온 경향이 짙었다. 다름을 품을 수 있는 넓이가 없다면, 더해진 높이와 깊이는 외롭고 끝이 날카로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익숙하고 잘하는 영역에서 이탈하려는 능동적인 노력이 없다면, 넓이는 끝내 이루지 못할 이상으로만 남을 수 있다. 낯선 환경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행위 없이 어찌 환대를 베풀 수 있겠는가. 환대는 익숙한 영역에서 인심 한 번 크게 쓰는 행위가 아니다. 낯섦의 체험 없이 어찌 타인을 환대할 수 있겠는가. 거기엔 깊은 공감이 전제되어 있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여기는 사랑이 이면에 깔려있다. 아브라함의 환대를 당시 문화의 영향이라든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훌륭해서라든지 하는 설명도 일리는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브라함 역시 나그네 신분으로서 나그네의 사정을 충분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이등병의 낯섦을 맛보지 않고 훌륭한 병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낯섦을 체험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넓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유아적인 발상일 수 있다. 대부분의 이등병들이 자기가 그리 싫어했던 병장과 똑같은 모습을 띤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체험 중엔 소외감을 비롯한 여러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다. 그래서 체험 후에 그것들을 앙갚음하려고 맘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바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타인을 향한 공감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라든지 하나님의 방법은 이 선택의 기로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결국 내 손이다.


넓어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늘 도전 리스트에만 올라가있던 책들을 읽기 시작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그리고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을 탐험할 작정이다. 함께 하는 동지가 있어 참 좋다. 동지 역시 나그네다. 이 사실이 나그네에겐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함께 가는 나그네. 돕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인생의 후반전은 넓이를 위한 도전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더 넓어지기 위해선 자연스레 깊어지기도 할 것이다. 깊이는 따라오는 것이다. 예전엔 목적이었던 것이 이젠 부수적인 의미가 되었다. 치열하게 사는 것은 자신이 익숙하게 잘하는 것만을 끈질기게 해대는 삶이 아니라고 믿는다. 거기엔 수많은 사람의 이해와 희생이 동반된다. 자신의 높이와 깊이를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은 결코 치열한 인생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기중심적인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젠 저 높이 빛나는 별이 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어둔 길을 나그네와 함께 하는 랜턴이 되거나 가로등이 되고 싶다. 언제 우리에게 높게 빛나는 별이 없었던가. 별은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은 어둡다. 그 어둠을 함께 할 동지가 필요한 것이다. 난 별이 아닌 동지가 되길 꿈꾼다.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in monolog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전  (0) 2019.03.11
용기  (0) 2019.03.11
경계  (0) 2019.03.05
비창, 그리고 노다메  (0) 2019.03.05
배려  (0) 2019.03.02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