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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비난과 정죄의 이면에는 멸시와 혐오와 배제가 숨어있다는 말에 동감한다. 비난이나 정죄의 말을 듣게 될 때 분노가 이는 이유는 단지 내뱉아진 말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뿜어져나온 화자의 내면의 근원에 나를 향한 멸시와 혐오와 배제가 녹아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난과 정죄를 일삼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은 자신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한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건 단순한 시치미가 아니다. 그들은 진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말을 들을 때 한동안은 참 궁색한 변명이구나 하는 생각 정도로 대충 이해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말은, ‘비난과 정죄를 하려고 일부러 맘먹은 적이 없다’ 라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어쨌든 그런 말을 하게 되지 않았냐고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다시 상대방에 대한 비난으로 향한다.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먼저 자신을 촉발시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하면서.
물론 이 역시 얼마나 사려깊지 못하고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한낱 인간의 가증스럽고 유치한 변명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나 역시 그들을 마찬가지로 혐오하고 배제하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와 그들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는 난 답할 수가 없다.
왠만한 사람들은 일부러 작정하고 악을 행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악한 의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어떤 현상은 언제나 특정한 정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때 그곳의 정황과 그 사람 내면의 뭔가가 클릭되어 벌어지는 행위라고 해석해야 한다. 단지 그 사람을 악마화하여 사탄에게 조종당했다고 진단하여 푸닥거리를 하려고 한다거나, 별 심각한 생각 없이 그저 오늘 좀 컨디션이 안 좋나보네 하고 축소시키며 사건을 단순화시킨다거나 하는 것 모두 사건을 제대로 보고 해석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악은 과정 중에 발현하는 법이다.
성찰이 중요한 이유를 하고 싶었다. 훌륭한 통찰을 접하더라도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 통찰은 오히려 독이 된다고 본다. 영적인 것만을 삶에서 분리시키는 행위도 이를 가속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개인의 인격과 성품은 공중에 떠있는 게 아니라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다. 소화할 수 있는 만큼,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만큼. 언제나 인간이란 앎과 행함의 균형에서 앎 쪽에 무게가 실리는 법이지만, 그 틀어진 균형을 인지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고 본다. 틀어진 균형의 소유자라면 적어도 자신이 그렇다는 정도는 인지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마치 자신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믿게 된다면, 난 그들을 교만한 자라고 부르고 싶다. 결국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자와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정하자. 우린 모두 틀어진 축을 가진 불균형의 도긴개긴의 인간들이란 것을. 적어도 그것만은 알고 있자. 지속적인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어쩌면 당신이 한 기도의 응답은 성찰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달라스 윌라드는 기도란 구하는 게 본질이라고 말하지만, 무엇을 구하느냐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성찰의 중요성을 난 조금 더 추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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