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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냄새.
어제 일이다. 파네라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차를 몰고 나오는 찰나, 동남아시아인 인듯한 한 남자가 다가와서 나보다 서툰 영어로 다짜고짜 도움을 요청한다. 미리 대본을 준비해온 듯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는다. 발음은 새고 눈빛은 흐리멍텅하다. 1분 가량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다가 내일도 여기 오냐고, 오면 돈을 되돌려 주겠다고 하며 말을 마친다. 그리고 대본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구술했음에 스스로 뿌듯한듯 웃음을 지으며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본다. 왠지 여유까지 느껴지는 웃음이다.
말은 많았으나 요지는 돈을 달라는 거였다. 이유는 나름 논리적이었다. 자신의 차에 연료가 바닥나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했다. 바로 앞에 주유소가 있는데, 하필 자기 지갑을 집에 놔두고 와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다고 했다. 집은 글렌데일이라 지갑을 가지러 가기에는 남은 연료료는 어림도 없다고 했다. 출근해야 하는데 시간도 부족하다고 했다.
딱했다. 그 상황이 진실이었다면 정말 애석한 상황이었다. 마침 내가 그곳을 지난 게 어쩌면 그에겐 구원과도 같았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설상가상, 누린지세, 진퇴양난, 머피의 법칙 등.
그러나 그가 묘사한 상황이 진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참으로 딱한 상황이긴 마찬가지였다. 돈 몇 푼 구걸하기 위해 저렇게까지 비굴하게 거짓말까지 해야 했을까 생각하니 오히려 더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난 지갑을 열어 현금이 얼마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0달러짜리 지폐가 하나 있었다. 내심 1달러나 5달러짜릴 기대했건만. 큰맘 먹고 그에게 쓴웃음을 살짝 지으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어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내일 여기 오면 돈을 갚아주겠다고. 알겠다고 하고 난 갈 길을 갔다.
그리고 오늘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혹시나 해서 찾아갔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속을 수도 있다는 충분한 짐작을 하고서도 돈을 주었기 때문에 멍청하게 후회는 하면 안 된다. 그러나 아쉽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어버려서 말이다.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 정리를 마쳤다. 예수의 제자라면 어떻게 이 상황에 반응했어야 했을까 생각해봤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거였을까. 거짓과 불의의 냄새가 분명히 났지만, 그게 확증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를 거짓말쟁이나 불의를 행하는 자로 치부하고 돈 달라는 요구에 거절하면 안 되는 거였겠지...손해를 눈치만으로 기정사실화하면 안되는 거겠지... 그러나 만약 지갑에 20달러짜리 지폐가 있었다면 난 어떡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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