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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소중한 일상의 무게.

제임스 설터 저, '가벼운 나날 (Light years)'을 읽고.

하루 24시간 전체가 ‘해피아워’에 속한 것 같은 삶. 눈을 떠도 감아도 언제나 햇살은 오후 서너 시 무렵의 기울기로 비스듬히 들어와 그들의 가벼운 삶을 비추었다. 느지막한 태양은 그들의 시간을 유난히 느리게 만들었고, 가시적인 재앙과 사건 사고는 그들을 모두 빗겨가는 것 같았다. 입을 옷은 넘쳐났고, 먹을 것도 풍족했으며, 그들이 사는 집은 거의 매일 손님들을 맞이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었다. 아이들은 예쁘고 예의 바르게 자랐으며, 그들은 부모로서의 자리 또한 훌륭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그러나, 신비로울 정도로 우월했던 그들의 삶이 가져다 준 안정감은 점점 나른함이 되었고, 식상해진 나른함은 기어이 권태를 불러왔으며, 권태는 인생의 중력을 거슬러 모든 나날들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버렸다. 그들의 삶은 점차 무게를 잃고 공중에 흩뿌려졌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그림 같은 그들의 삶 속에 무언가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어쩌다가 ‘가벼운 나날’이란 유리 감옥에 갇혀버린 것이었을까.

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썼다. “숨 쉴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수시로 깊은 숨을 내쉬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피학적 쾌감 때문에 나는 그만 진이 다 빠져버렸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난 책의 삼분의 일 정도 읽었을 때 벌써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공감하기 싫거나 두려운 부분을 공감할 수밖에 없을 때 조용히 찾아오는 불가항력적인 탈진을 느끼면서. 나의 깊은 한숨은 이미 책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예전에 읽었던 긴 장편소설,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백치’, 혹은 헤세의 ‘유리알유희’보다 분량이 적은 이 책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숨이 된 허무함을 절망이라는 날숨으로 화답해야 했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매일 책갈피로 표시된 부분을 펼 때마다 긴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러고도 미처 몇 십 페이지도 못 읽고 다시 닫아야만 했다. 준비운동이 부족했던 탓일까. 아니다, 그건 영원히 부족할 것이다. 삶을 다 아는 한이 있더라도. 착잡했다.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그림 같은 감옥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일상을 잃어본 사람은 일상의 의미를 안다. 인생을 저울에 올리면 대부분은 일상의 무게일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서 일상을 빼고 남은 찌꺼기를 잘 포장한 것을 영화라고 부른다. 평범한 일상은 위대하다. 평소엔 느끼지 못하는 그 무게.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그 무게. 하지만 그 무게의 표면적인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해져 기억조차 나지 않는 기계적인 나날들의 연속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 날들이 사라져버리면, 그제서야 뒤늦게 자신의 인생에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텅 비어버린 삶의 껍데기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이러한 일상을 거의 완벽하게 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잃은 삶보다 더 큰 구멍이 난 듯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허영심. 아마도 허영심일 것이다. 아내 네드라와 남편 비리의 내밀한 허영심, 그리고 큰 딸 프랑카와 작은 딸 대니에게도 전염된 그 허영심. 오후 서너 시 경의 따스하고 나른한 햇살은 그들의 창자 속에 있는 허영이라는 풍선을, 개구리가 든 냄비의 온도를 조금씩 높이듯, 아주 천천히 부풀게 했다. 그들의 나날들이 가벼워졌던 건 태평성대로 포장된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무게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소리 없이 조금씩 부푼 허영이라는 풍선을 삼킨 사람들의 결국이 마침내 가시적으로 나타나 ‘가벼운 나날’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데다 지적이기까지 했던, 그러나 책임감을 상실한, 그 위험한 자유를 갈망했던 네드라. 그 갈망은 자기연민조차 사라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본능적인 자유 추구는 결국 파멸을 가져왔다. 그녀는 어느 날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께 살기가 불가능해. 네 눈엔 안 보이나 봐. 그를 사랑해. 너무 좋은 아빠야. 하지만 끔찍해. 설명이 안 돼. 가루가 되는 것 같아. 할 수 없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리는 거야. 그냥 가루 먼지가 되는 것 같아." 이미 오랫동안 진행된 생각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무서워하는 유일한 건 '평범한 삶'이라는 두 단어야."

네드라는 이 책의 중심인물이다. 말하자면, 바이러스의 첫 감염자와도 같았다. 인생에서 일상의 무게를 가볍게 여겼으며, 그것을 등진 채 무책임한 자유를 추구했다. 그것이 바이러스 감염 징후였다. 작가 설터가 묘사한 부분 중 네드라를 가장 잘 대변한 문장은 내게 있어서 다음과 같다. "그녀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이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충분히 행복하고도 남을 삶을 허투루 날려버린 죄인에 대한 묘사다.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허망하고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 그녀의 삶에는 감사가 없었다. 아픔과 슬픔이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그녀를 빗겨갔기 떄문이었을까.

그녀의 딸이 성인이 된 이후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비롭네요. 정말 멋진 삶을 살았네요. 너무나 우월한. 그러나 당신의 삶은 무의미해요. 왜냐하면 그 안에 고통이 없어요. 이따금씩 약간의 슬픔마저 없는 삶이란 결국 뭘까요?"

네드라는 사십대에 죽었다. 찾아온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사실 나도 네드라의 죽음에 전혀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마음 한편에선 인과응보라며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고자 하는 내밀한 욕구가 꿈틀거림을 느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던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죽기 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은 작가 설터가 그녀를 묘사한 부분이다. 그녀가 세속적인 만족을 추구하며 그것이 자유라고 믿어온 삶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기 얼마 전의 상태를 묘사한 부분이다. 아마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이 부분에 담겨 있지 않을까 한다. "하루하루, 고열같이 솟구치는 감정이나 만족감뿐 아니라 허망함과 공포까지 재료 삼아 그녀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갔다. 나는 고독의 공포를 넘어섰다고, 그건 초월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흥분이 되었다. 나는 그 위에 있고 가라앉지 않을 거야. 이 굴복이, 이 승리가 그녀를 더욱 강하게 했다. 마치 하위 단계들을 다 지나 삶이 마침내 가치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된 것 같았다. 바보 같은 희망과 기대, 꾸민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할 때도 있었다. 이 행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찾아나서 얻어낸 성취였다. 그보다 못한 것은, 그것이 비록 대체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모두 포기하고 얻은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재앙을 당하여 아파하고 죽어간 숱한 사람들의 절망과 네드라를 위시한 이 가족의 허망함을 저울에 달면 무게는 어느 쪽에 더 나가게 될까. 물론 바보 같은 질문이다. 고통은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나처럼 이런 어리석은 비교를 시도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가벼운 나날과 무거운 나날이 가지는 무게에 대한 철학적인 비교를 말이다.

네드라를 형상화한 것만 같은 이 책의 표지를 매일 보며 이 책을 거의 한 달에 걸쳐 읽어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밀레의 만종을 떠올렸다. 곧바로 인터넷에서 그 그림을 찾았다.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깊은 위로를 얻었다. 오늘도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도감과 또 하루가 주어졌다는 감사함이 있는 삶. 그런 일상을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내며 행복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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