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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인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대학 시절, 방학이 되면 포항 시골을 떠나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이면 나는 종종 습관대로 서면에 있던 대형 서점인 '동보서적'을 찾았다. 대학생이 된 나는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과학이나 의학 코너가 아닌 문학 코너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었다. 그땐 소설보다는 시를 읽었고, 맘에 들면 그 시가 담긴 시집을 구매할 마음도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중학생 때 칼릴 지브란과 헤르만 헤세와 괴테를 읽으며 스며든 문학적 감성이 대학생이 된 나를 시집 코너로 인도했던 것이다.

1996년. 그 당시만 해도 많은 젊은 시인들이 낭만에 가득 차 저마다 부르짖는 사랑 노래를 시로 담아 책으로 만들었었다. 연애 편지에나 사용할법한 낯간지러운 시부터 시작해서 몇 번을 읽어야 비로소 무언가가 묵직하게 와 닿는 시까지, 시집 코너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집이 넘쳐났다. 이 책 저 책 내키는 대로 시를 읽어가다 보면 한 두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메뚜기처럼 그날도 이 시집 저 시집을 들춰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의 시에 사로잡혀 난 그 책을 끝내 구매하고야 말았다.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시인 이름은 똑똑히 기억이 난다. 릴케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뭔가가 달랐다. 굉장히 감성적이면서도 절제가 잘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겉이 아닌 심층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릴케를 처음 만났다. 감수성이 여전히 예민했던 풋풋한 20대의 시작점에서 릴케를 만났던 건 행운이었다.

40대에 접어든 내가 저번 주말 중고 서점에서 우연히 릴케를 만났던 건 일종의 데자뷰였다. 언제나 중고 서점에 들르면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꼼꼼히 살피는데, 마침 릴케의 책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순간, 시간이 멈추면서 내 기억은 20여 년 전으로 훌쩍 뛰어갔고, 동보서적 시집 코너에 서서 시집 한 권에 몰입해있던 과거의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혼자서 기분이 좋아 입가에 웃음이 걸린 채 그 책을 구입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이 책은 시집이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오른 릴케의 작품인데 시집이 아니라니 나도 처음엔 의아했었다. 그러나 릴케는 시나 산문보다 훨씬 많은 양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 책은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라는 이름의 작가에게 릴케가 보낸 열 편의 편지를 모아놓은 작품이다.

카푸스는 문학 지망생이었다. 릴케와 같은 사관학교에 다녔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릴케의 시집에 몰입해 있던 중, 릴케가 학생일 때도 있었던 호라체크 목사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릴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카푸스는 자신이 쓴 습작 시들을 릴케에게 보내 그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타고난 소질과 그가 가질 직업이 서로 어긋나는 길을 걷기 시작했을 무렵이었고 막 스무 살이 되려는 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카푸스는 단순히 그가 쓴 시에 대한 평가나 조언을 받기 위한 목적이 아닌 솔직한 인생 고민까지도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편지로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그는 몇 주 후 릴케의 성실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쓰인 답장을 받게 된다. 1903년 2월 17일 파리에서 보내온 편지였다.

그 후 열 번째 편지가 작성된 날짜는1908년 12월 26일이다. 약 5년 간의 기간 동안 주고 받은 편지, 그 안에 담긴 젊은 날의 무수한 고민과 좌절과 방랑의 여정. 그것들에 대한 인생의 선배이자 고독한 시인의 길을 꿋꿋이 먼저 간 릴케의 답장이 바로 이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릴케는 창작의 고통 중 마주해야만 하는 고독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다. 삶과 죽음, 고독과 침묵, 그리고 그로부터 길어 올려 예술로 승화시킨 글, 곧 시의 언어. 무엇보다도 릴케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이니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고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권면한다. 쉬운 것보다는 어려운 것을 신뢰하고 매달리라고 말한다. 늘 충분한 인내심을 지니고 소박한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릴케가 가진 입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고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사랑입니다." 그렇다. 릴케는 섣불리 서로가 하나가 되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경솔함을 넌지시 지적하며, 개개인이 먼저 성숙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간다. 릴케의 시집이 왜 20대의 나를 사로잡았었는지, 왜 막 스무 살이 되려던 카푸스를 사로잡았었는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독 가운데,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지속된 훈련으로 스스로 몸과 영혼을 다진 뒤, 그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릴케의 사색과 성찰. 그리고 그것들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시. 아마도 나와 카푸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가진 고민에 릴케의 시가 나름대로의 해답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만간 정말 오랜만에 릴케의 시집을 하나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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