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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눈이 깊어지는 과정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9. 18. 06:30

눈이 깊어지는 과정.

모든 상처는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한 사람의 고유한 컨텍스트를 이룬다. 이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던져진 교훈과 책망이 자칫 폭력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좋은 씨가 좋은 역할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이라는 환경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씨라도 나쁜 토양에 떨어지게 되면 그 영향에서 완전히 독립적이기는 불가능하다. 뿌려진 씨에게 지속적인 영양분을 공급하는 공급자는 어쨌거나 그 토양이다.

만남이 겉핥기식 단계를 벗어날 무렵이면 그 만남은 곧 나의 상처와 상대방 상처와의 만남이 된다. 컨텍스트와 컨텍스트의 만남, 두 세계관의 충돌. 그러므로 어떤 만남이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은 신비다. 충돌을 넘어서는 것은 곧 초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서로를 솔직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안다는 말은 서로의 상처가 남긴 흔적, 그리고 그 고유한 흔적이 만들어낸 가시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말이며, 이는 그 사람의 약점과 치부도 알고 품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가시로부터의 찔림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점에서, 친구나 이웃이라 함은 아무한테나 함부로 사용할 가벼운 말이 아니라, 이 단계를 거친 관계에서만 사용해야 하는 고귀한 말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을 초월이라 여긴다. 만남의 진정성과 그 깊이는 이성과 합리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으로까지 침투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듯 합리성에 근거한 이성으로는 결코 다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서로 간의 깊은 관계로의 진입와 진화에 분명히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맹목’이라는 미지수가 들어간다. 이는 우리가 신뢰라고 부르는 결과로도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며, 반대의 경우 혐오로 나타나도록 만들어주기도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건 어느 시점부터 그 사람을 신뢰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혐오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자료와 증거를 가지고도 정반대의 해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던가. 결국 그 맹목이라는 요소는 주관적 해석에 다름 아니며, 그 해석은 개인의 고유한 컨텍스트에서 비롯된다. 이성적이지만 이성적이지 않은, 그 묘한 케미스트리.

한편, 맹목이라는 게 비이성적인 영역을 포함한다 해도 그것이 자신의 선택으로 시작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에게 책임감이라는 짐을 지어준다.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신뢰하거나 혐오한 댓가는 어쨌거나 자신의 몫이다. 누군가는 미처 몰랐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변명조차도 비이성적이라는 건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늘 합리적이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애를 쓴다. 가능한 많이 알고 선택하길 원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실수라는 행동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막상 우리의 모든 선택이 합리적이라면, 사람을 신뢰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영영 이루지 못할 이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대방을 신뢰하기로 선택하는 것이지, 그 상대가 신뢰할만한 모든 증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뢰하는 게 아니다.

진정한 겸손은 얕은 관계에서 보일 수 있는, 단순히 겸양 떠는 매너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너도 나도 상처를 입고 가시를 품은 도긴개긴인 인간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인다는 건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성을 이해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일이다. 컨텍스트와 무관하게 무작정 덮어놓고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립서비스나 가식적인 퍼포먼스 따위가 아니다. 겸손은 상대를 위한 것이지 자신을 위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알고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 그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 이 신비는 우리의 이성과 비이성의 합작품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이루어내는 장본인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우리 자신이다. 다분히 이성적이면서 또 비이성적인 우리 인간. 다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선택에 책임을 져야하는 인간. 때론 실수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때론 행운으로 기록되기도 하는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이 신비를 일상에서 누리는 오늘의 삶. 예상치 못한 더 날카로운 가시에 찔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있을 때 가능한 더 많은 사람을 품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다. 어쩌면 내가 선택하고 바라는 인생의 후반전의 삶은 가시에 찔려도 괜찮은 맷집을 기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나의 눈이 좀 더 깊어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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