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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일주일.

가난한선비/과학자 2020. 3. 16. 02:59

일주일.

이사 후 일주일. 방마다 쌓여있던 박스의 90% 정도가 사라졌다. 이젠 요리도 할 수 있고, 빨래도 할 수 있고, 인터넷도 사용할 수 있다. 오늘은 아이와 간식을 먹으면서 영화 한 편을 재미있게 봤다. 집 안에 상주하던 퀴퀴했던 박스 냄새도 거의 사라졌고, 집 안을 맨발로 걸을 때 발바닥이 시꺼멓게 되지도 않는다. 이제 겨우 사람 사는 집 같다.

이사 직후 맞이한 첫 주. 매일 아침 1시간 반, 저녁 1시간 반 이상의 운전을 하며 아이의 학교와 애프터스쿨과 내 직장을 오갔다. 아무런 사고 없이 한 주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미국 온 이후 치렀던 다섯 번이 넘는 이사 중 이번이 가장 힘들었다. 노후된 몸과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도 왼쪽 무릎은 이젠 걸을 때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고, 오른손가락 관절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 의지와 거의 상관없는 몸의 자연적인 치유력에 경이감을 느낀다.

아이도 피곤했을 것이다.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차 안에 갇혀 있는 게 어디 좀 쉬운 일이랴. 그나마 응급조치로 도서관에서 빌린 오디오 북을 듣느라 그 시간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테다. 킬킬대다가 또 잠시 잠들다가 하며 잘도 견뎌냈다. 대견한 녀석. 이럴 때 엄마가 더 보고 싶을 텐데. 아빠를 생각해서일까. 한국 다녀 온 며칠 간은 엄마가 보고 싶어 닭똥 같은 눈물까지 흘렸던 녀석이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 아빠로서 할 수 있는 걸 다 한다 해도 언제나 엄마의 공백을 다 메울 수 없다. 그 빈자리는 언제나 아쉽다.

오늘은 거의 10시간을 잤다. 낮잠까지 합치면 12시간. 이제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 같다.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많이 해방 받은 상태라고나 할까. 다음 주부터 나도 재택근무, 아들도 연장된 봄방학 시작이다. 천재지변인 코로나19 때문에 생긴 예상치 못한 일정이다. 부디 이런 강력한 조치 덕분에 4월부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길 소망한다.

며칠 마트에 가도 두루마리 휴지를 구입하지 못했다. 집에 남은 3개로 잘 버틸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마트 진열장엔 많은 것들이 텅텅 비어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 사재기의 현장. 순간 왜 한 발 빠르지 못했을까 하는 자동적인 생각이 들다가 "아차" 하는 나를 발견했다. 어느새 자본의 힘에 중독된 우리들의 실태를 본다. 두루마리 휴지 사태는 사람들의 패닉 심리를 반영하는 징후일 것이다. 그러나 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심리가 더 두렵다. 미국 시민들 (특히 와스프들)의 훌륭한 매너와 자신감 넘치는 친절, 마치 사려 깊은 것처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표정과 몸짓들의 이면에 있는 자본의 힘. 그 고급스런 선진국민의 가면도 그저 가진 자의 여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몹시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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